사십구재27 [머리 감기]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마음대로 머리를 감을 수 없었다. 향기 나는 샴푸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반들하게 기름진 나의 머리칼을 보고 종종 같은 반 친구들이 머리를 감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고, 혹은 전날 밤에 샤워를 했다고 어설프게 코대답만 하였다. 등교길을 나서기 전, 나는 종종 아버지 몰래 짧은 머리를 세숫비누로 감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를 벗어서 가스레인지 한쪽 끝에 올려두었다. 슬리퍼를 신고 부엌 한가운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 선 다음 등목 하는 자세로 허리를 구부려 정수리가 바닥을 보게 했다. 수도꼭지를 반쯤 돌려 물이 나오는 소리가 가장 적은 부분으로 맞췄다. 수돗물이 세숫대야에 채워지면 물끼리 부딪.. 2025. 3. 28. [손바닥 흉터] 중학생이 되었지만 가끔씩 수암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동생이랑 공을 차며 놀았다. 어느 날은 운동장에서 넘어져 손바닥에 큰 상처가 났다. 흙바닥이었던 운동장은 쌀알크기만 한 작은 돌들이 많았다. 그 수많은 돌들 중 하나가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내 오른 손바닥을 깊게 파내었다. 빨간 피가 흘렀다. 나는 오른 팔목을 부여잡고 개수대로 가 상처를 흐르는 물에 씻었다. 피는 금방 멎었지만 상처부위가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나는 상처를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바닥을 가리며 생활했다. 그러나 큰 상처 주변으로 붉게 물든 작은 생채기들까지 숨기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먼저 이 상처를 아버지에게 말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난 저녁에 아버지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상처를 보고는 아버지.. 2025. 3. 27. [각목] 또 무슨 잘못을 한 걸까. 형은 오른팔로 작은 방 벽 모서리를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벽 너머로는 아버지가 형의 왼팔을 잡고 큰 방 안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겁에 질린 형의 얼굴에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꼴통을 쳐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리 와라, 이 개새끼야.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아버지는 벽 너머 틈새에서 각목을 꺼내려고 했다. 동생과 나는 작은 방의 구석에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어느새 우리도 입 밖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때리지 마세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의 팔을 잡고 내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중학생이었던 두 아들이 힘에 부쳤는지 아버지는 각목이 있는 곳까.. 2025. 3. 27. [피시방] 처음으로 PC방을 가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형을 따라 불암산 둘레길 입구 앞에 있는 삼층짜리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이 층으로 올라서자마자 마주한 투명한 유리문에는 '가가PC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시방 내부는 어두웠다. 불이 비치지 않아 깜깜토록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천정에서 비치는 노란색 조명이 검정색 벽과 바닥 타일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어둠을 내몰고 있었다. 우리 삼 형제는 카운터로 가 500원을 내고 자리 하나에 30분을 충전했다. 형이 먼저 앉았고 나와 동생은 내 키랑 비슷한 의자 양옆으로 서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했다. 형은 당시 유명했던 RPG게임을 켜고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다. 미리 아이디를 만들어두었는지 로그인을 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이.. 2025. 3. 26. [모기 물린 곳] 아버지는 십 센티미터 정도의 바늘을 가져왔다. 그 바늘은 중간 부분이 조금 구부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왼손으로 내 오른팔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움켜잡았다. 내 팔목 위로 선홍빛으로 단단히 부어오른 곳을 아버지는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오른손으로 바늘을 집어 모기 물린 부위를 찌른다. 뾰족한 삽으로 흙을 퍼내듯 바늘 끝이 아래로 향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묵직한 딱! 소리와 함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바늘에 찔린 곳에 피가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바늘로 딸 준비를 한다. 딱! 바늘로 찌른 곳에 눈으로 보일 정도의 아주 작은 구멍이 생겼다. 아버지는 엄지와 검지로 그 부위를 짜기 시작했다. 살이 짓이겨지는 고통에 왼손은 주먹이 쥐어졌고 눈이 질끈 감겼다. 아버지의 손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 2025. 3. 16. [수학문제집]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날에 담임선생님께서는 책 표지가 빳빳한 새 문제집들을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수학, 영어, 국어 등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급되는 문제집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넉넉하지 않아 희망하는 학생들만 받을 수 있었다. 반 친구들은 그 문제집들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다. 긴 겨울방학 동안 공부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겠지. 작년 일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수학문제집 이백 쪽짜리를 삼일만에 풀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수학 문제집에 달라붙어있었을 정도로 문제풀이가 무척 재미있었다. 문제집을 받아와 올 겨울 방학동안에 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받을 수 없었다. 남이 주는 것은 절대 받지 말라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단념하고 빈 앞자리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문.. 2025. 2. 24. [방학] 가을의 끝자락. 구절초도 서서히 제 힘이 다하여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우리 삼 형제의 방학도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삼 형제는 집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방학수업만이 우리들을 집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워드프로세서 2급] 필기시험반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수요일에 한 시간 삼십 분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학수업은 언제냐? 월, 수, 금,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삼십 분까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라. 응. 신청서에 사인은 내가 할게. 그래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방학수업 시간표를 보여주지 않은 채 아버지의 서명을 대신 하고 재단용 쇠.. 2025. 2. 22. [복지회관 운동장] 이따금씩 주말마다 복지회관 운동장으로 공을 차러 갔다. 그 운동장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쌈지마당을 지나 불암산 둘레길을 넘어가면 넓다란 운동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복지회관 운동장이다. 형이랑 동생이랑 팀을 바꿔가며 축구를 했다. 그렇게 놀고 있을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볼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천천히 방황하듯 걸어 다녔다. 한적한 복지회관 운동장에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아버지는 더욱 경계하며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복지회관에서 놀 때는 유일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 놓고 깔깔대며 웃어서는 안됐다. 그렇게 웃으면 멀리서 아버지가 웃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럼 우리 셋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땅을 바라.. 2025. 2. 21. [역물구나무] 다리 올려라. 아버지가 말씀하신 뒤 우리 삼 형제는 일제히 큰 방과 작은 방 사이의 벽을 바라보았다. 벽을 마주 보고 가까이 앉아 다리를 거꾸로 든다. 어깨는 차가운 바닥에 닿아 몸을 지지하고 손바닥은 골반을 받친다. 발끝은 하늘을 향해 올리니 마침내 역물구나무 자세가 되었다. 균형을 잃어 휘청거릴 때는 재빨리 발바닥으로 벽을 짚어 균형을 되찾는다. 우리는 컴퓨터를 하기 전에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컴퓨터 의자'를 폈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접이식 장의자였다. 그 의자의 가로는 내 키를 넘도록 길어 혼자서는 접고 펼칠 수가 없었다. 항상 삼 형제가 함께 펴고 접었다. 그 의자에 장시간 앉아있고 나면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다리 들기'를 하라고 했다. 피가 하체로 쏠려 하체비만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 2025. 2. 21.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