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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마을5

[방학] 가을의 끝자락. 구절초도 서서히 제 힘이 다하여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우리 삼 형제의 방학도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삼 형제는 집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방학수업만이 우리들을 집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워드프로세서 2급] 필기시험반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수요일에 한 시간 삼십 분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학수업은 언제냐?  월, 수, 금,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삼십 분까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라.  응. 신청서에 사인은 내가 할게.  그래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방학수업 시간표를 보여주지 않은 채 아버지의 서명을 대신 하고 재단용 쇠.. 2025. 2. 22.
[복지회관 운동장] 이따금씩 주말마다 복지회관 운동장으로 공을 차러 갔다. 그 운동장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쌈지마당을 지나 불암산 둘레길을 넘어가면 넓다란 운동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복지회관 운동장이다. 형이랑 동생이랑 팀을 바꿔가며 축구를 했다. 그렇게 놀고 있을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볼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천천히 방황하듯 걸어 다녔다. 한적한 복지회관 운동장에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아버지는 더욱 경계하며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복지회관에서 놀 때는 유일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 놓고 깔깔대며 웃어서는 안됐다. 그렇게 웃으면 멀리서 아버지가 웃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럼 우리 셋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땅을 바라.. 2025. 2. 21.
[지네한테 물린 날] 산이 초록빛이던 여섯 살의 어느 초여름 날이었어. 엄마와 함께 집 뒤편에 있는 감자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어. 옆에는 실외기가 있었는데, 10만 원짜리 에어컨이 뭐 저리 시끄럽게 쌩쌩 돌아가는지. 아니, 저렴한 싸구려라서 저렇게 소리가 컸던 걸까. 뜨거운 실외기 바람을 피해 쪼그려 앉아 쇠숟가락으로 화분을 쏘삭거렸어. 화분 속에서 콩벌레도 나오고 개미도 나왔어. 난 곤충을 손으로 가지고 놀 정도로 좋아해서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가 비닐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끼고 흙을 정리하고 있었어.   난 맨손이 편한데. 비닐장갑 답답한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흙을 퍼내는데 지네가 나오더라. 까맣고 길다란 몸에 수십 쌍의 빨간 다리를 가진 지네. 그림책에서만 보던 지네를 실제로 본 나는 그게 참 신기했어. 손으.. 2025. 1. 30.
[쌈지마당]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 2025. 1. 30.
2022/02/02 - 우리 동네 ​ ​ 보정은 안한 사진들이다. 2022년 02월 01일 2023.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