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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본동4

[방학] 가을의 끝자락. 구절초도 서서히 제 힘이 다하여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우리 삼 형제의 방학도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삼 형제는 집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방학수업만이 우리들을 집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워드프로세서 2급] 필기시험반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수요일에 한 시간 삼십 분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학수업은 언제냐?  월, 수, 금,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삼십 분까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라.  응. 신청서에 사인은 내가 할게.  그래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방학수업 시간표를 보여주지 않은 채 아버지의 서명을 대신 하고 재단용 쇠.. 2025. 2. 22.
[복지회관 운동장] 이따금씩 주말마다 복지회관 운동장으로 공을 차러 갔다. 그 운동장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쌈지마당을 지나 불암산 둘레길을 넘어가면 넓다란 운동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복지회관 운동장이다. 형이랑 동생이랑 팀을 바꿔가며 축구를 했다. 그렇게 놀고 있을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볼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천천히 방황하듯 걸어 다녔다. 한적한 복지회관 운동장에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아버지는 더욱 경계하며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복지회관에서 놀 때는 유일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 놓고 깔깔대며 웃어서는 안됐다. 그렇게 웃으면 멀리서 아버지가 웃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럼 우리 셋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땅을 바라.. 2025. 2. 21.
[지네한테 물린 날] 산이 초록빛이던 여섯 살의 어느 초여름 날이었어. 엄마와 함께 집 뒤편에 있는 감자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어. 옆에는 실외기가 있었는데, 10만 원짜리 에어컨이 뭐 저리 시끄럽게 쌩쌩 돌아가는지. 아니, 저렴한 싸구려라서 저렇게 소리가 컸던 걸까. 뜨거운 실외기 바람을 피해 쪼그려 앉아 쇠숟가락으로 화분을 쏘삭거렸어. 화분 속에서 콩벌레도 나오고 개미도 나왔어. 난 곤충을 손으로 가지고 놀 정도로 좋아해서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가 비닐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끼고 흙을 정리하고 있었어.   '난 맨손이 편한데.' '비닐장갑 답답한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흙을 퍼내는데 지네가 나오더라. 까맣고 길다란 몸에 수십 쌍의 빨간 다리를 가진 지네. 그림책에서만 보던 지네를 실제로 본 나는 그게 참 신기.. 2025. 1. 30.
[쌈지마당]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 2025.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