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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쌈지마당]

by EugeneChoi 2025. 1. 30.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바람이 부드럽게 춤추듯 날아온다. 그 바람을 타고 갖은 꽃과 나무와 계곡과 새들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마을 곳곳으로 전해진다. 참새들과 까치들이 네 모자가 모여 앉은 돗자리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쟤네들은 저기서 뭘 하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제 할 일을 하러 떠난다. 돗자리 위로 연둣빛 진딧물 한두 마리가 기어오른다. 빨간 무당벌레가 날아와 내 손등에 착지한다. 주먹을 꼭 쥔 채로 높이 들어올리자 무당벌레는 내 작은 주먹의 가장 높은 곳으로 꼬물꼬물 올라가서는 겉날개와 속날개를 펼치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내 입은 여전히 천자문을 외운다. 엄마가 읽는 천자문을 우리 삼 형제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따라 복창한다.

  .....
  이끼 언, 이끼 재, 언 호, 이끼 야.

  어느덧 마지막 천 번째의 한자 "이끼 야"를 외친다. 천자문 시간이 끝나고 어머니는 말을 이으신다.

  영명아. 항상 허리는 곧게 펴고 시선은 살짝 아래로 향하거라. 눈으로는 올바르게 보려고 하고 귀로는 좋은 말들을 들으려고 하며, 코로는 좋은 향기만 맡거라.


  부드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귀를 간지럽힌다. 따뜻하고도 포근했다.

  이웃 할머니께서 오더니 참 예쁘다, 아들 셋이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겼나,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말씀해주시고는 저만치 멀리 햇살 내리는 돌담 위에 걸터앉으신다. 잠시 뒤에 친구 할머니께서 그 할머니 옆에 따라 앉으시고는 한참 동안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는 다시 사자소학을 읊는다. 아비 부, 날 생, 나 아, 몸 신! 어미 모, 기를 국, 나 오, 몸 신... 우리들의 목소리가 쌈지마당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퍼진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느티나무의 싱그러운 초록빛과 거뭇한 돌담의 빛깔, 내리쬐는 노란 햇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평안이 끊기지 않기를, 속으로 거듭 바랐다.




중계쌈지마당 (2013.05.23.)

 


중계쌈지마당 (2014.05.17.)





중계쌈지마당 (2015.04.11.)






중계쌈지마당 (2015.05 ~ 06)






중계쌈지마당 (2015.09.14.)




중계쌈지마당 (2016.06.24.)





중계쌈지마당 (2016.11.05.)





중계쌈지마당 (2025.02.22.)

 

맑은 날에는 사랑의 해시계
흐린 날에는 믿음의 지우산
쌈지마당에 모이는 행복한 내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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