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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25

[어느 여름날] 여름이 찾아왔다. 사실, 여름이 찾아온 지 이미 두 달이 되었다.요새는 마음이 괜찮다고 느낀다. 글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였던가.아, 그날을 기억한다.내게 몇 없는 여름날의 기억.기껏 기억해내봤자, 시간당 강수량이 100mm를 넘겼던 폭우가 쏟아지던 날우산이 막아주지 못할 정도로 강한 비바람이 불었던 날.*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뒤집어지는 우산을 꼭 쥐고 집으로 걷고 있었다.바람이 강해서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번쩍 하며 하늘이 순간 불꽃놀이라도 하듯 밝아졌다가뒤늦게 찾아와 내 귀를 때렸던 천둥소리.이미 온몸과 신발은 비에 젖어버려 걸을 때마다 물에 적신 스펀지를 밟는 것 같았던 그날.한껏 빗물을 머금은 바지가 걸을 때마다 내 다리를 앞뒤로 붙잡았다.나는 울었다.비바람이 춥지.. 2025. 7. 7.
[파란색 잠바] 형은 파란색 잠바를 아버지 몰래 사서 입고 다녔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덕분에 파란 플라스틱 청소도구함이 가득 차 버렸다. 형은 그 잠바를 무척 좋아했다. 형이 돈을 모아 사게 된 첫 외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이 가득한, 신체에 비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행을 타지도 않을 평범한 파란색 패딩을 형은 매일 입고 다녔다. * 여느 날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과 컴퓨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아빠가 잠깐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형이랑 같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입에서는 욕들이 튀어나왔다. 형은 그 파란 패딩과 통이 넓지 않은 교복 바지를 입은 채로 아버지에게 멱살이 잡혀 끌리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거 벗어서 바.. 2025. 4. 22.
[교복 바지] 집 앞 골목을 나서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쌈지마당. 쌈지마당의 끝에는 세 개가 붙어 있는 공용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형과 나는 학교를 가기 전에 그 화장실을 들렀다. 화장실 바깥 좌측으로는 여러 청소도구가 담긴 허리 높이의 파란색 물통 다라이가 하나 있었다. 형은 그 다라이의 뚜껑을 열어 청소도구 아래에 깔려있는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꺼냈다. 단단히 묶인 비닐봉지를 풀자 가지런히 접힌 잿빛 교복 바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교복 바지를 바꿔 입고 나왔다. 공중화장실을 나올 때 머리만 빼꼼 내밀어 집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형은 벗은 바지를 비닐 안에 도로 넣어 플라스틱 다라이 안 청소도구 아래에 두었다. 뚜껑을 덮고 우리는 다시 한번 뒤를 확인한다... 2025. 4. 22.
[묘연사의 겨울]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어느 겨울날, 보건선생님께 우연히 들킨 내 허리의 멍자국들 때문이었다. 나는 넘어져서 멍이 생겼다고 둘러대었지만 보건 선생님은 그 멍자국들을 대수롭게 넘기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까지 알게 되었고 나는 상담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동보호센터 차량 안에서 젊은 남자 관리자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아동보호센터로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이라는 나이는 '아동'에 포함되지 않았다. '쉼터'라는 곳도 있었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어린 나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만 버티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다 버리고 가는 것도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있는 묘연사에서 지내기로 했다... 2025. 4. 19.
[목초액] 등과 어깨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붉게 올라오는 그것들을 아버지는 피부병이라고 불렀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왜 몸에 여드름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스트레스 때문이다, 잘 씻어야 한다,라는 뜬구름 잡는 정보만 있을 할 뿐, 명확하게 어떤 원인으로 여드름이 생기고 이것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사춘기라서 여드름이 난다고 하는데 왜 사춘기일 때 여드름이 나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더러운 새끼야. 뭘 처먹고 다니길래 이런 게 몸에 나냐. 너 담배 피우냐?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들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도 이상한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드름이 난대요. 나는 아버.. 2025. 4. 15.
[머리 감기]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마음대로 머리를 감을 수 없었다. 향기 나는 샴푸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반들하게 기름진 나의 머리칼을 보고 종종 같은 반 친구들이 머리를 감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고, 혹은 전날 밤에 샤워를 했다고 어설프게 코대답만 하였다. 등교길을 나서기 전, 나는 종종 아버지 몰래 짧은 머리를 세숫비누로 감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를 벗어서 가스레인지 한쪽 끝에 올려두었다. 슬리퍼를 신고 부엌 한가운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 선 다음 등목 하는 자세로 허리를 구부려 정수리가 바닥을 보게 했다. 수도꼭지를 반쯤 돌려 물이 나오는 소리가 가장 적은 부분으로 맞췄다. 수돗물이 세숫대야에 채워지면 물끼리 부딪.. 2025. 3. 28.
[손바닥 흉터] 중학생이 되었지만 가끔씩 수암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동생이랑 공을 차며 놀았다. 어느 날은 운동장에서 넘어져 손바닥에 큰 상처가 났다. 흙바닥이었던 운동장은 쌀알크기만 한 작은 돌들이 많았다. 그 수많은 돌들 중 하나가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내 오른 손바닥을 깊게 파내었다. 빨간 피가 흘렀다. 나는 오른 팔목을 부여잡고 개수대로 가 상처를 흐르는 물에 씻었다. 피는 금방 멎었지만 상처부위가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나는 상처를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바닥을 가리며 생활했다. 그러나 큰 상처 주변으로 붉게 물든 작은 생채기들까지 숨기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먼저 이 상처를 아버지에게 말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난 저녁에 아버지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상처를 보고는 아버지.. 2025. 3. 27.
[각목] 또 무슨 잘못을 한 걸까. 형은 오른팔로 작은 방 벽 모서리를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벽 너머로는 아버지가 형의 왼팔을 잡고 큰 방 안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겁에 질린 형의 얼굴에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꼴통을 쳐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리 와라, 이 개새끼야.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아버지는 벽 너머 틈새에서 각목을 꺼내려고 했다. 동생과 나는 작은 방의 구석에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어느새 우리도 입 밖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때리지 마세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의 팔을 잡고 내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중학생이었던 두 아들이 힘에 부쳤는지 아버지는 각목이 있는 곳까.. 2025. 3. 27.
[피시방] 처음으로 PC방을 가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형을 따라 불암산 둘레길 입구 앞에 있는 삼층짜리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이 층으로 올라서자마자 마주한 투명한 유리문에는 '가가PC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시방 내부는 어두웠다. 불이 비치지 않아 깜깜토록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천정에서 비치는 노란색 조명이 검정색 벽과 바닥 타일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어둠을 내몰고 있었다. 우리 삼 형제는 카운터로 가 500원을 내고 자리 하나에 30분을 충전했다. 형이 먼저 앉았고 나와 동생은 내 키랑 비슷한 의자 양옆으로 서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했다. 형은 당시 유명했던 RPG게임을 켜고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다. 미리 아이디를 만들어두었는지 로그인을 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이.. 2025.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