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PC방을 가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형을 따라 불암산 둘레길 입구 앞에 있는 삼층짜리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이 층으로 올라서자마자 마주한 투명한 유리문에는 '가가PC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시방 내부는 어두웠다. 불이 비치지 않아 깜깜토록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천정에서 비치는 노란색 조명이 검정색 벽과 바닥 타일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어둠을 내몰고 있었다. 우리 삼 형제는 카운터로 가 500원을 내고 자리 하나에 30분을 충전했다. 형이 먼저 앉았고 나와 동생은 내 키랑 비슷한 의자 양옆으로 서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했다. 형은 당시 유명했던 RPG게임을 켜고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다. 미리 아이디를 만들어두었는지 로그인을 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이 캐릭터를 만들고 십 분 정도 플레이한 뒤에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같은 아이디로 이번에는 내 캐릭터를 만들었다. 나도 조금 플레이하고 동생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아이디에 세 개의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에 같이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었다. 그걸 알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한 뒤 피시방으로 걸었다.
우리는 피시방을 자주 갈 수 없었다. 피시방을 다닌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킨다면 그날이 제삿날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농담을 섞어 말하곤 했다. 상계역부터 집까지 사십 분 남짓한 거리를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오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피시방을 가라도 돈을 줄 리도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아버지의 지갑을 보게 되었다. 지갑 안에 담긴 열 장 남짓한 만 원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나는 아버지의 외투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 한 장을 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형과 동생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형과 동생은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 어떤 쓴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그 돈으로 피시방을 갔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가끔씩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댔다. 형과 동생은 혹시나 들킬까 두려워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형은 이런 나에게 조심하라는 말만 할 뿐 나를 멈춰세울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돈으로 같이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돌아올 때 간식을 사 먹으니 내심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나는 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만 원권을 훔치며 몇 해의 추운 겨울을 흘려보냈다.
우리는 피시방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잠시라도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공간에서 웃으며 놀 수 있었다. 여름엔 집보다 시원했고 겨울엔 집보다 따뜻했다. 피시방의 어두운 노란 불빛 아래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으면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에 모든 불안이 사라졌다. 손님들에게 항상 웃어주었던 사장님도, 아르바이트 형도 만날 때마다 반가웠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고 저녁무렵이 되어 집에 돌아갈 때면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집을 나와서 우리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가 살았던 묘법연화사가 서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아버지 몰래 그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는 피시방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큰길을 걸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우리가 내일도 피시방을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우리에게 피시방은 게임만 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묘법연화사 외에 우리가 갈 수 있는 단 한 곳뿐인 도피처였다.
사십구재/유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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