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날에 담임선생님께서는 책 표지가 빳빳한 새 문제집들을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수학, 영어, 국어 등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급되는 문제집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넉넉하지 않아 희망하는 학생들만 받을 수 있었다. 반 친구들은 그 문제집들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다. 긴 겨울방학 동안 공부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겠지.
작년 일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수학문제집 이백 쪽짜리를 삼일만에 풀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수학 문제집에 달라붙어있었을 정도로 문제풀이가 무척 재미있었다. 문제집을 받아와 올 겨울 방학동안에 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받을 수 없었다. 남이 주는 것은 절대 받지 말라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단념하고 빈 앞자리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문제집들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담임 선생님이 눈치챈 것일까, 방과 후에 조용히 나를 불렀다.
영명아, 이거 가져가고 싶지? 많이 가져가.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영어와 수학 문제집 한 권씩 총 두 권을 잘 포개어 내 가방에 넣어주었다. 전기장판 위에 엎드려서 이불을 덮고 수학 문제풀이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지만,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형체 흐린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걱정 때문인지 책들 때문인지, 무언가로 가득 차버린 무거운 가방을 들쳐메고 불암산 둘레길을 오른다. 마른 낙엽으로 가득한 내리막길을 지나 물소리 들리는 작은 계곡을 넘는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빠에게 문제집을 보여주었다. 아빠는 그 문제집들을 보자마자 내 멱살을 붙들고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그지 새끼냐? 왜 이런 걸 받아오냐. 아빠가 남이 준 거 받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죽고 싶어서 그러냐?
많이 맞았다. 대충 헤아려도 백 대 이상 맞은 것 같았다. 머리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막으려다 팔꿈치와 팔, 손등에도 푸르스름한 얼룩이 수십 개나 생겼다. 손가락도 맞아서 다섯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진정이 되고 난 후, 아버지는 나를 집에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복지회관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노랗게 말라버린 잔디 사이로 몸을 숨긴 풀벌레들이 갸날프게 날개를 떨었다. 나무가 우거진 산 너머로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엉킨 듯이 정돈된 전봇대의 전선 위로 가마귀들이 날아들어 울기 시작한다.
앞으로 주먹을 뻗으면서 걸어라.
나는 걸었다. 여남은 명의 중년들이 운동하던 그 노란 벌판에서 나는 주먹을 뻗으면서 여러 바퀴를 걸었다. 어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잠깐 쳐다봤다. 짧은 시간 동안 눈빛으로 많은 말을 건네다가, 이내 다시 각자 이 운동장에 온 목적을 행한다.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허공에 팔을 내지르면서 걷고 또 걸었다. 걷던 도중 혹시나 어머니가 묘연사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넓은 들판에서 주먹을 전방으로 내지르며 한 시간 가까이 걷는 내 모습을 어머니가 혹시라도 보시진 않을까, 창피스러움에 차가운 두 볼이 붉게 붉게 물들었다.
다음날 학교 선생님에게 찾아갔다. 선생님.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책을 건네는 손등에 그려져 있는 노란 멍을 선생님이 보았다. 이거 왜이러니? 놀다가 넘어졌어요. 아버지가 말하라는 대로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이 문제집들은 다른 친구들에게 나눠줄게.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자리로 돌아와서 앉는다. 담임선생님이 이 멍들의 원인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멍들이 시끄럽게 내뱉는 이야기들을, 선생님이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고 푸른 얼룩들을 인지한 후 바뀌어버린 선생님의 눈빛이, 한껏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그 표정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복지회관 운동장 (2025.02.22.)
사십구재/유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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