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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방학]

by EugeneChoi 2025. 2. 22.

  가을의 끝자락. 구절초도 서서히 제 힘이 다하여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우리 삼 형제의 방학도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삼 형제는 집 밖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방학수업만이 우리들을 집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워드프로세서 2급] 필기시험반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수요일에 한 시간 삼십 분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학수업은 언제냐?
  월, 수, 금,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삼십 분까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라.
  응. 신청서에 사인은 내가 할게.
  그래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방학수업 시간표를 보여주지 않은 채 아버지의 서명을 대신 하고 재단용 쇠가위로 신청서 절취선을 따라 오려냈다. 동생 청명이도 나를 따라 방학수업 신청서를 작성하고 가방에 넣었다. 중학생이었던 형은 금요일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방학수업 시간표가 달라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금요일마다 청명이와 둘이서 어머니를 보러 가기로 했다. 짧은 한 시간 반 동안 묘법연화사에 들러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설레었다. 실내화 주머니에 워드프로세서 교재를 들고 집을 나가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어머니를 만나고 나면 그 가방을 잠시 구석에 놓아두고 교재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
  방학 동안에 식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느 가족들과는 달리 우리는 방학에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잠시 들러 삼십 분 동안 어머니와 함께했던 학기 중의 시간들이 그리웠다. 우리는 왜 방학 동안에 더 어머니를 볼 수 없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학교를 가지 않는 방학에 집 밖을 나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하나의 규칙이었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우리에게 말했다. 추운 겨울방학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내 새끼들을 더 자주 볼 수 있겠다고. 

  아빠한테 월, 수, 금이라고 했어?
  응. 
  아빠한테 들키면 어쩐다니?
  괜찮아. 아빠가 그런 거는 확인 잘 안해.
  그래? 그래도...
  친구들이랑 놀고 싶었다고 하면 돼. 몇 대 맞으면 되지.
  아빠가 때리지 않아야 할 텐데... 아빠한테 들킬 것 같으면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응. 걱정하지 마, 엄마.

  연탄난로의 훈기에 몸이 더워진 나는 비닐 천막을 걷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의 끄트머리, 커다란 돌바위 위에 나무판자로 세워진 기울어진 화장실 지붕 위로 때까치들이 날아와 앉는다. 스님이 올려두신 쌀과 콩을 부리로 쪼아 먹기 시작한다. 아지와 준이가 비닐 천막 앞에 얌전히 앉아 조용히 새들을 바라본다. 살살 부는 차가운 칼바람에 아지의 검은 털이 물결치기 시작한다. 준이야 아지야 들어와. 비닐 천막 안으로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아지와 준이가 들어온다. 나도 준이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준이가 새카만 눈동자로 뒤따라오는 나를 흘깃 쳐다본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뒷발로 제 목을 몇 번 긁고 이내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다. 나는 준이의 배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팔과 다리 곳곳을 마사지해 준다. 그런 내 옆에서 청명이는 아지를 이리저리 만져주며 예뻐해 준다.

  언제쯤 삼 형제랑 같이 사나? 얼른 아빠가 죽고 우리 넷이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응. 나도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

  어머니는 수줍은 미소를 얼굴에 띤 채 우리 삼 형제와 단 넷이서 살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 방학 동안의 묘법연화사가 좋았다. 포근한 어머니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얼른 방학이 끝나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매일 라면만 끓여주는 이 방학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교를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하굣길에 묘법연화사를 찾아가 어머니 품에 와락 안기고 싶었다.
  금요일의 두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묘법연화사에서 집으로 갈 준비를 할 무렵마다, 어머니는 스님이 갖가지 한약재로 푹 우려낸 약을 나와 청명이에게 한 잔씩 먹였다. 그 약은 쓰고 뜨거웠다. 하지만 동대문을 갈 때마다 아버지가 사주시는 칡즙을 먹어온 우리는 그 약이 먹지 못할 정도로 쓰지 않았다.
  짧은 시간 속 오고 가는 정담은 서로의 눈빛 속에 담겨 겨울바람과 함께 마음속에 쌓여간다. 밤사이 쌓인 눈들이 햇빛의 따사로움에 녹아 사라지듯, 기다란 공허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겨울방학은 끝을 향해 갔다. 
  



집으로 가는 길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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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2016.10.25.)





집으로 가는 길 (2025.02.22.)

나무 판자 화장실 옆의 청명이 / 위에서부터 아지, 구봉서, 사미타, 칠칠이, 뭉치, 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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