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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어머니를 찾은 날]

by EugeneChoi 2025. 2. 14.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나서도 우리 삼 형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면, 혹은 두 달이 지나면 다시 어머니가 돌아오겠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돌아올 때 달큰한 동지팥죽을 한 아름 싸들고 오시겠지. 형형색색의 옥춘과 부드럽고 짭조름한 쌀과자, 때 아닌 송편을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겠지,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부처님. 엄마가 돌아오게 해주세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관세음보살님. 나무묘법연화경. 소원성취진언. 엄마를 만나게 해 주세요. 

   간절히 빌고 또 빌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삼형제는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등굣길에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자. 엄마가 어디에 있을까. 멀리 떠나버렸을까.
  일단 학교 끝나면 모이자. 사교시 끝나면 구령대 앞으로 와.
  그럼 내가 병설유치원 앞에서 청명이 데리고 갈게. 거기서 기다려.

  어린 삼형제는 등 뒤로 책가방을 하나씩 메고 한 손에는 실내화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일월의 겨울바람은 날카로웠다. 가끔씩 흩날리는 눈발이 눈과 코를 간지럽혔다. 우리는 목적지를 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일단 모여서 막연히 뭐라도 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부터 열하나, 아홉, 일곱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삼 형제가 하교할 무렵, 매일같이 어머니가 서서 삼 형제를 기다렸던 수암초등학교 정문을 시작으로 어머니 손을 잡고 걸었던 모든 하굣길을 어머니 없이 걸어 나갔다.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모든 어른들의 뒷모습과 걸음걸이, 옷차림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렇게 수암초등학교부터 중계본동 10번종점까지 걸어갔지만 어머니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전략을 바꾸었다.

  우선 집 근처에서부터 찾자. 엄마가 우리를 자주 데리고 갔던 절부터 가보자.
  거기 길 알아? 우리끼리 가본 적은 없는데.
  아빠한테 들키면 어떡해. 
  안들키게 해야지. 주위 잘 살피면서 따라와.

  10번종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은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오른쪽은 어머니가 자주 다녔던 절 '묘법연화사'가 있는 길이었다. 백사마을은 거미줄처럼 모든 길이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길로 가더라도 결국에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씩 어머니와 함께 걷곤 했던 오른쪽 길을 택했다. 경사가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넓은 보폭의 빠른 걸음으로 걸어 올라갔다. 우리 동네 길을 걸어 다닐 때면 바닥을 보고 걸어야 했다. 아스팔트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이곳저곳 갈라지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발을 잘못 디디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오르막길을 일렬횡대로 오르다가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골목길에 자동차가 들어서면 일렬종대로 바꾸어 벽에 밀착한 채로 나란히 걸음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걸으면서도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여나 이 골목에서 저 골목에서 아버지가 튀어나온다면 그 자리에서 집으로 끌려가 한참을 맞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우선 걸음을 멈추고 발소리에 집중했다. 그 발소리가 아버지의 걸음걸이와 다르면 안심했고 그 발소리가 아버지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다면 우리는 길가에 보이는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는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폐를 풀고 나와 가던 길을 걸었다. 

  묘법연화사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수십 마리의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높다란 묘법연화사의 울타리 안쪽으로 뭉치와 보름이, 칠복이, 칠칠이가 보인다. 우리 삼형제는 무릎 높이의 계단 열몇 개를 오르며 묘법연화사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한 우리들을 향해 개들은 큰소리로 컹!컹! 짖어댔다. 우리를 알고 있는 개들은 짖는 것을 멈추고 혀를 내민 채로 헥헥거리며 신나게 꼬리를 흔든다. 우리를 경계하던 개들은 아르릉거리면서 짖어대다가 우리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개들이 나무라자 이내 조용해졌다.

  야 이놈들아, 조용히 해. 짖지 말어. 조용히 해.

  묘법연화사 정문은 불투명한 회색빛 비닐로 켜켜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비닐 천막 안으로부터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삼형제는 침묵 속에서 비닐 너머를 응시한다. 그 여인의 목소리를 따라 수십 마리의 개들이 순식간에 비닐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에 천막 뒤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나왔다. 어머니였다.

  엄마!
  엄마.
  엄마.
  아이고 얘들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춥다 얼른 들어와.

  삼형제는 울면서 어머니에게로 안겼다. 어머니는 한 달 새 몸이 몰라보도록 야위어있었다. 그럼에도 그 따스한 품속 온기는 여전했다. 우리들은 어머니를 따라 비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십 마리의 강아지들, 스무 마리의 고양이, 단단한 우리 속 얌전한 두 마리의 토끼가 우리들을 반겼다. 그들 중 몇은 여전히 우리를 경계했고, 몇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를 따라 이곳으로 올 때면 항상 보던 풍경이었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아빠는 잘 지내니. 
  응 잘 지내. 

  아빠가 계속 때리니.
  응, 근데 이제 안아파. 우리 다 컸어. 

  여기는 항상 스님이 과일이고 과자고 먹을 것을 항상 사다 놓으셔.
  와  진짜? 맨날 와서 먹을래.

  그럼. 그러니까 언제라도 와서 많이 먹고 가. 스님이 만들어주시는 약도 한 컵씩 먹고 가. 
  앗싸. 아빠가 해주는 밥, 맛 없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참 그리웠다.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말투와 옷차림, 부처님 이야기, 독경소리. 모든 것이 사무치도록 그리웠었다. 묘법연화사에서 나가기 싫었다.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 깊숙한 어느 곳으로부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증오 가득한 욕설과 폭력이 느껴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었다. 어머니와 삼 형제가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아버지가 빨리 죽게 해달라고, 묘연사를 들어오고 나설 때마다 악의를 품은 기도를 끊을 수 없었다.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5.05.01.)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5.08.05.)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6.02.16.)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6.03.24.)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6.05.16.)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16.07.18.)

 




묘법연화사로 가는 길 (2025.02.22.)

서울수암초등학교 앞, 어머니가 항상 우리를 기다렸던 곳




설공이를 안고 있는 어린 청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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