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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어머니가 집을 떠나던 날]

by EugeneChoi 2025. 2. 14.

  함박눈 나부끼던 겨울이었다. 삼 형제는 부모님이랑 함께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종로, 청량리, 동묘였을까. 아버지의 양손에는 무언가를 가득 담은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잠시 검은 비닐봉지를 문 앞에 내려놓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아버지의 손이 허리 쪽으로 이동한다. 허리춤에서 수많은 열쇠들이 부딪히는 쨍쨍한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혁대고리에 끈을 하나 묶고 그 끈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모든 열쇠를 다 연결해 두었다. 그 짤랑거리는 것들 중 하나를 동그란 열쇠구멍에 맞춰 꽂은 뒤 돌려 문을 열었다. 부엌에 신발을 벗어두고 엄마방으로 올라가자마자 아버지는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다짜고짜 어머니를 패기 시작한다. 

  또 왜 때려!
  이 사창가 개 잡씹보다도 더러운 데서 나온 년아. 왜 전기장판을 켜고 나갔냐. 이거 안 보이냐. 지금 이거 켜져 있는 거 안 보이냐.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시작된 말다툼은 십 분이 넘도 이어졌다. 아마 그보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한 맺힌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계속 소리쳤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냐고. 한 번쯤은 그냥 넘어가줄 수는 없는 거냐고. 꼭 이렇게 때려야만 속이 시원한 거냐고.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가락질하며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멈추지 않고 쏟아낸다. 삼 형제는 아빠방에 들어가 정좌자세로 앉아 있다. 어른들이 말할 때 다른 짓을 했다가는 또 얻어맞을 것이 뻔했기에,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에도 방 안에서 아무 말 않고 정좌자세로 앉아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다른 평범한 날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머니의 입에서 집을 나가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아버지가 이 집구석에서 꺼지라고 말해도 수년간 잠자코 듣고 있었던 어머니가, 오늘은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단호하게 집을 나가겠다고 하시기 전까지는.

  그럴거면 나가라 이 잡년아. 당장 이 집에서 꺼져버려. 쌍판떼기도 보기 싫다, 이 미친년아.
  나갈거야! 나가서 돌아오지도 않을 거야.

  이윽고 어머니가 큰 가방 두세 개를 천정에서 꺼냈다. 여전히 양쪽 볼에 얇은 눈물이 흐르는 채로 어머니는 옷가지들을 가방 안으로 쑤셔 넣으신다. 묘법연화경을 포함한 몇 권의 책과 볼펜도 가방 안에 넣으신다. 천장에 구깃하게 보관되어 있던 가방이 어느새 가득 차 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부피가 커졌다. 그런 가방이 세 개나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이 집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했을까, 아홉 살의 나는 울기 시작했다. 정좌자세로 움직이지도 않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형의 얼굴을 살핀다. 무표정한 형의 볼에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생이 보였다. 동생은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두 작은 손으로 어머니의 너덜너덜한 바짓자락을 움켜잡는다.

  엄마, 가지 마. 엄마. 엄마... 엄마...

  동생이 서럽게 울면서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런 동생을 뒤로하고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올린다. 동생은 더 힘껏, 더 소리 내어 울부짖는다. 나는 형과 나란히 앉아 엄마를 바라보며 섧게 운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또래의 친구들보다 키가 작은 것이, 지금껏 먹어온 모든 것들이 모두 눈물로 만들어져 몸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이내 어머니는 부엌 너머로, 문 너머로 나가버렸다. 
  아버지와 삼 형제는 어머니의 떠나는 뒷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열린 부엌문틈 사이로 찬 겨울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집 앞 골목 잡초들 사이로, 돌틈 사이로 숨어있는 귀뚜리들의 울음소리들이 집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우리는 방안의 같은 자리에서 멍하니 오래도록 서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뒷모습을 남긴 채로 반쯤 열려 있는 작은 방 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문에게 무엇이라도 말하도록 요구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바라보면 어머니가 마음을 바꿔 다시 돌아오기라도 할 듯이. 반복해서 들리는 숨소리는 어둡고 질겼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애절함과 원통함이 뒤섞여 집안 곳곳의 찢겨진 벽지 사이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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