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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파란색 잠바]

by EugeneChoi 2025. 4. 22.

  형은 파란색 잠바를 아버지 몰래 사서 입고 다녔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덕분에 파란 플라스틱 청소도구함이 가득 차 버렸다. 형은 그 잠바를 무척 좋아했다. 형이 돈을 모아 사게 된 첫 외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이 가득한, 신체에 비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행을 타지도 않을 평범한 파란색 패딩을 형은 매일 입고 다녔다.

*
  여느 날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과 컴퓨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아빠가 잠깐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형이랑 같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입에서는 욕들이 튀어나왔다. 형은 그 파란 패딩과 통이 넓지 않은 교복 바지를 입은 채로 아버지에게 멱살이 잡혀 끌리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거 벗어서 바닥에 둬라. 바른 대로 말해라. 누구한테 빼앗겼냐? 이 개새끼야.
  이 정신이상자 새끼야. 어딜 가서 아빠가 사준 잠바를 뺏기고 이 시퍼런 걸 입고 오냐. 
  어떤 나쁜 놈들이랑 어울리길래 바지까지 뺏기고 없냐. 이 잡새끼야.
  어떤 놈이 바지가 작아져서 니 껄 빌려 입은 거냐.
  그런데도 아무말 못하고 뺏기고 그 쫙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냐, 이 개새끼야.

  다행히도 공중화장실 옆 청소도구함에서 옷을 꺼냈다는 것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형은 작은 방에서 파란색 잠바를 벗어 발 앞에 두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만을 바라본다. 형은 친구 하나가 자신의 바지를 빌려간 것이라고 말한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이 바지와 잠바를 자신이 돈을 모아서 샀다고 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또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분명했다. 설사 거기에 진실된 마음으로 답을 한다고 하여도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 형은 침묵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굳은 얼굴로 바닥만을 응시하였다. 

  아가리 안 여냐? 이 개새끼야. 무슨 말이라도 해라 이 개 잡씹보다도 더러운 데서 나온 놈의 새끼야. 얼마나 더 맞아야 입을 열래, 응?

  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실랑이는 십 분 동안 이어졌다. 아버지는 부엌에서 재단가위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 패딩을 가위로 찢기 시작했다. 우리 삼 형제는 일절 움직이지 않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타타탁- 부우욱- 솜털 가득한 패딩이 찢겨지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가위가 우리에게로 향할지도 몰라 나는 가위의 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파란 잠바를 쉴새없이 찔러대는 아버지의 재단가위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따금씩 가위날에 솜털이 들러붙어 두꺼운 부분이 지저분하게 잘렸다. 아버지는 수 분 동안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잠바의 팔꿈치, 목, 가슴 부분이 전부 난도질되어 더 이상 사람이 입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장 피가 튀는 몸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화의 대상이 아버지인지 형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내가 가까이 서자 아버지는 이번에 나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인니 너 이리 와라. 넌 이게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냐. 왜 광명이 이새끼는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하냐.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 매캐한 연기가 폐 속으로 점점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불쾌함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말을 똑바로 해... 왜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해! 그 옷을 입고 싶으면 입고 싶다고 왜 말을 못 해! 지켰어야지. 그렇게 입고 싶었으면 지켰어야지...

  아버지는 꿰뚫어버릴 듯 일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표정이 경직됐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버지의 눈동자 속으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부엌으로 나간다. 어디선가 흰색 종량제 봉투를 가져와 형에게 던졌다.

  주워 담아라, 이 개새끼야. 니가 쓰레기를 가져왔으면 니가 치워야지. 니가 집 밖으로 내다 버려라.

  그날 아버지는 더 이상 형을 때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형에게 그 친구놈에게 가서 바지를 다시 바꿔올 수 있냐고 물었다. 형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형은 여느 날처럼 등굣길에 공중화장실을 들렀다. 이번에는 통이 넓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등교를 했다가, 집으로 올 때는 쌈지마당 공중화장실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왔다. 그날 아버지는 형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거짓말만이 현재 이 순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 화목해질 수 없는 가족이라는 것. 단 한 순간도 웃을 수 없는 집안이라는 것. 하루라도 조용하게 지나가는 날이 없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서서히 내 숨통을 조였다. 집을 나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형은 이삼일 동안 등굣길에 바지를 갈아입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는 다시 공중화장실을 들러 바지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형은 다시는 그 파란 잠바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시 돈을 모아 새 잠바를 사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순응하기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하기로 한 듯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들의 남겨진 옷들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공중화장실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청소도구 다라이에 담긴 우리들의 옷을 갖다 버리지 않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곳을 감시하듯 바라보았다.

 

2014.12.03. 형이 입었던 잠바과 교복바지
2014.12.03. 형의 파란 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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