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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유소시

[머리 감기]

by EugeneChoi 2025. 3. 28.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마음대로 머리를 감을 수 없었다. 향기 나는 샴푸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반들하게 기름진 나의 머리칼을 보고 종종 같은 반 친구들이 머리를 감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고, 혹은 전날 밤에 샤워를 했다고 어설프게 코대답만 하였다. 
  등교길을 나서기 전, 나는 종종 아버지 몰래 짧은 머리를 세숫비누로 감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를 벗어서 가스레인지 한쪽 끝에 올려두었다. 슬리퍼를 신고 부엌 한가운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 선 다음 등목 하는 자세로 허리를 구부려 정수리가 바닥을 보게 했다. 수도꼭지를 반쯤 돌려 물이 나오는 소리가 가장 적은 부분으로 맞췄다. 수돗물이 세숫대야에 채워지면 물끼리 부딪혀 물소리가 커지기에 세숫대야는 먼발치에 치워두었다. 물이 흘러나오는 호스의 끝 부분을 머리로 가져가 십 초 동안 머리카락을 적신 뒤, 찬 공기에 더 단단해진 비누를 젖은 머리카락에 거칠게 열 번 문질렀다. 비누칠 소리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수도꼭지를 열고 닫을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물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수돗물을 잠그지 않았다.

  하얀 비누거품이 머리를 뒤덮었을 때 세숫대야를 호스 아래로 옮겨 물을 받았다. 물이 채워질 동안 손톱을 세워 두피를 박박 긁기 시작했다. 가려움이 사라질 즈음 세숫대야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졌다. 세숫대야의 양쪽 끝을 잡고 머리를 물속으로 푹 담갔다. 불린 미역을 헹구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두 손으로 비누거품을 지워냈다. 다시 호스를 머리로 갖다 대어 이십 초 동안 정수리부터 목 주변까지 꼼꼼하게 헹구어냈다. 비누거품을 헹궈낼 때마다 두피가 찢어질 듯 시려와 얼굴을 찡그렸다. 얼음물의 한기가 두피를 뚫고 머리 깊숙까지 들어오는, 이십 초의 헹굼이 끝나갈 무렵에는 두피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듬이 생기지 않도록 손톱으로 두피를 박박 긁으며 헹구어내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기 서린 두통만이 두피의 끝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머리를 다 감고 나면 탁한 비눗물로 가득한 세숫대야를 천천히 기울여 물을 조금씩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이 하수구로 내보내면 제법 큰 소리가 났기에 아버지가 잠에서 깰 수도 있었다.

  머리를 감고 나면 개운했다. 뒤늦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며칠 동안 괴롭히던 가려움과 반들거리는 머리카락의 기름기가 지워졌다. 젖은 수건으로 털어내듯 급하게 머리를 말린 뒤 벗어둔 티셔츠를 도로 입었다. 부엌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포츠컷의 짧은 머리카락은 금방 건조해졌다. 일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머리를 감았으리라고 아버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렇게 몇 주 동안은 아버지 몰래 머리를 감고 등교를 했었다. 어느 날 젖은 비누를 눈치챈 아버지가, 머리를 감던 도중 부엌문을 쾅!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열어버리기 전까지는.

  야이 개새끼야. 너 뭐하냐. 아빠가 아침에 머리 감지 말라고 안 했냐. 왜 이렇게 아빠 말을 안 듣냐, 이 개 잡씹보다도 더러운 데서 나온 놈의 새끼야. 아빠 말이 말 같지 않냐. 이 잡새끼야. 사창가 개 잡씹보다도 더러운 데서 나온 놈의 새끼야. 칼로 찔러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야.

  로드킬을 당하기 직전,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잠시 실명되어 몸이 굳어버린 사슴처럼,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작은 방과 부엌의 문턱에 서서 화난 얼굴로 새하얗게 거품칠된 내 머리를 보고 있었다.

수돗물 잠가라.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향한 채 손만 위로 올려 더듬거리며 수도꼭지를 찾은 뒤 잠갔다. 아버지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부엌으로 달려나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패기 시작했다. 차가운 수돗물에 감각이 사라져 버린 두피는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던지는 주먹에 맞춰 내가 보는 시야만 박자에 맞춰서 흔들렸다. 아버지의 주먹이 조금씩 하얀 비누거품으로 물들었다.
  맞고 있는 동안에도 찬 겨울공기가 몸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와 내 몸을 식혔다. 갈빗대가 오그라들고 폐가 떨리듯 호흡하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손은 손끝부터 얼얼토록 시려왔다. 내 손을 뒤덮은 크고 작은 비누거품들이 빠르게 사라져 핏기 없는 살색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어느새 내 팔과 가슴은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른 헹구고 들어와라, 이 개새끼야.

  아버지에게 맞는 동안 세숫대야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손을 씻은 뒤, 늘 하던대로 머리를 담가 비누거품을 헹궈냈다.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더 이상 수돗물을 틀지 않았다. 탁해진 세숫대야 속 물들을 한꺼번에 흘려보낸 뒤에도 맑은 물로 머리를 헹궈내지 않았다. 오래도록 허리를 숙이고 있었던 탓인지 상체를 바로 세울 때 허리가 뻐근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듯 말렸다. 아버지는 내가 머리를 말리고 티셔츠를 입을 때까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젖은 수건을 제자리에 둔 뒤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부엌의 불을 끄고 미닫이 방문을 내던지듯 밀어 닫았다. 나는 내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딱딱한 이불베개가 눈물로 얼룩져갔다. 문을 닫는 소리에 형과 동생이 잠에서 깼는지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적막 속에서 이불속 공기는 내 체온으로 다시 훈기를 되찾았다. 나는 등교할 때까지 잠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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