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골목을 나서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쌈지마당. 쌈지마당의 끝에는 세 개가 붙어 있는 공용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형과 나는 학교를 가기 전에 그 화장실을 들렀다. 화장실 바깥 좌측으로는 여러 청소도구가 담긴 허리 높이의 파란색 물통 다라이가 하나 있었다. 형은 그 다라이의 뚜껑을 열어 청소도구 아래에 깔려있는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꺼냈다. 단단히 묶인 비닐봉지를 풀자 가지런히 접힌 잿빛 교복 바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교복 바지를 바꿔 입고 나왔다. 공중화장실을 나올 때 머리만 빼꼼 내밀어 집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형은 벗은 바지를 비닐 안에 도로 넣어 플라스틱 다라이 안 청소도구 아래에 두었다. 뚜껑을 덮고 우리는 다시 한번 뒤를 확인한다. 혹여나 다른 바지를 입은 형의 모습을 아버지가 보게 될까, 우리는 큰길을 피해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굽이진 골목길로 등교를 했다.
아버지가 사주신 교복 바지의 통은 내 키에 맞는 바지 통의 두 배 가까이 되었다. 키가 백사십이었던 내가 받은 바지는 백팔십짜리가 입는 바지였다. 아버지는 긴 바지 기장을 내 다리 길이에 맞춰 줄였다. 교복 바지를 입고 걷고 있으면 쉴 새 없이 바지가 펄럭였다. 비가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산이 바지를 다 가리지 못해 흠뻑 젖고 말았다.
넌 바지 통이 왜 이렇게 커?
원래 이렇게 크게 팔던데.
새로 사귄 친구들 나랑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대충 둘러대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물어보는 친구가 많아지면서 더이상 입 아프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토요일이었다. 학주선생님이 없던 틈을 타서 중3 선배 네 명이 교문에 모여 담배를 피고 있었다. 조끼 없이 와이셔츠와 넥타이, 다리에 짝 달라붙는 스키니 교복 바지 복장으로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 쟤 광명이 동생 아냐?
야, 잠깐 이리 와 봐.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너 광명이 동생이지? 광명이랑 존나 똑같이 생겼다.
그러게. 야 광명이는 어디 있어?
어, 저기 광명이 걸어온다.
형이 저 멀리 학교 쪽에서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형은 통이 큰 바지와 신체에 맞지 않는 와이셔츠, 마이를 입고 있었다.
이야, 바지 통 넓은 것도 똑같네.
바지 좀 줄여라 광명아. 존나 쪽팔리지 않냐.
형은 그 선배들이랑 친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반일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형을 괴롭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오고 가며 한 마디씩 주고받는 그런 '아는 사이'였다. 그 일이 계기였을까, 형은 통이 넓지 않은 교복 바지를 사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
아버지는 교복 바지를 한 달에 한 번 빨아주었다. 흰 셔츠의 세탁 주기는 그것보다 짧았지만 그래도 제때 세탁을 하지 못해 목에 닿는 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었다. 교복 마이는 겨울 시작 전후로 일 년에 단 두 번만 빨 수 있었다. 아버지가 빨래를 해주고 나서는 항상 옷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그 향은 빨랫비누의 향도 아니었고, 섬유유연제의 향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마치 유통기한이 한참을 지나버린 살충제와 양잿물 표백제, 무향의 주방세제가 섞여 말라버린 듯한 냄새였다. 그래서 가끔씩은 아버지가 빨래를 해주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입지 않은 옷에서 나는 지린내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몸에 꼭 맞는 교복 바지가 더러워지면 형은 묘연사로 가서 어머니께 바지를 맡겼다. 빨래할 옷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가 묘연사에서 빨아준 옷에서는 언제나 좋은 향이 났다. 그래서 통이 큰 바지는 어머니께 부탁하지 않았다. 섬유유연제 향을 아버지에게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바지를 빨고 정신병자처럼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오냐- 하며 도깨비같이 화난 표정으로 우리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는 장면이 눈앞에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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