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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27

[어머니를 찾은 날]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나서도 우리 삼 형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면, 혹은 두 달이 지나면 다시 어머니가 돌아오겠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돌아올 때 달큰한 동지팥죽을 한 아름 싸들고 오시겠지. 형형색색의 옥춘과 부드럽고 짭조름한 쌀과자, 때 아닌 송편을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겠지,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부처님. 엄마가 돌아오게 해주세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관세음보살님. 나무묘법연화경. 소원성취진언. 엄마를 만나게 해 주세요.     간절히 빌고 또 빌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삼형제는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등굣길에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 2025. 2. 14.
[어머니가 집을 떠나던 날] 함박눈 나부끼던 겨울이었다. 삼 형제는 부모님이랑 함께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종로, 청량리, 동묘였을까. 아버지의 양손에는 무언가를 가득 담은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잠시 검은 비닐봉지를 문 앞에 내려놓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아버지의 손이 허리 쪽으로 이동한다. 허리춤에서 수많은 열쇠들이 부딪히는 쨍쨍한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혁대고리에 끈을 하나 묶고 그 끈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모든 열쇠를 다 연결해 두었다. 그 짤랑거리는 것들 중 하나를 동그란 열쇠구멍에 맞춰 꽂은 뒤 돌려 문을 열었다. 부엌에 신발을 벗어두고 엄마방으로 올라가자마자 아버지는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다짜고짜 어머니를 패기 시작한다.    또 왜 때.. 2025. 2. 14.
[싫어하는 음식] 너는 싫어하는 음식 있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여러 개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미역, 식판, 미끌거리는 촉감, 구토, 신맛, 닭껍질, 기름, 돼지비계. 그것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긴 세월 속 바뀌어버린 음식 체질에 이따금씩 나열된 음식들을 먹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음식들의 미끌거림을 느낄 때면 옛 기억들이 혀 끝에서부터 흘러나와 온몸을 휘감는다. 이따금씩 숟가락을 들고 앉아서, 미역국 너머로 천천히 그려지는 그 기억의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미역]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한 어느 봄날이었다. 형과 동생과 나란히 방바닥에 정좌로 앉아 어머니가 차려주실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역국을 만들어 가져왔다. 그때 나는 미역국을 싫어했다. 미역의 미끌거리는 촉감이 불쾌했다.. 2025. 2. 12.
[규칙1] 아가리 찢지 마라.  일절 웃어서는 안 됐다. 명심보감에 따라 웃는 자들은 정신이상자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만에 하나 옅은 미소라도 지은 것이 아버지의 눈에 띄었을 때는 주먹으로 머리를 수십 차례를 맞았다. 아버지는 다른 곳은 건들지도 않고 오로지 머리만 때렸다. 머리에 하얀 피가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꼴통을 빠개서, 머리통을 부숴서 하얀 피를 다 꺼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맞을 때마다 머리에서 피가 나기를 바랐다. 정말로 내 머릿속에 하얀 피가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는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맞은 곳을 또 맞아 오래된 배터리처럼 부풀어 오른 혹들이 터지기를 바랐지만 더욱 단단하게 붓기만 할 뿐, 그 혹들은 찌그러지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아버지는 쇠몽둥이로 머.. 2025. 2. 3.
[물벼락] 어머니가 나의 뒷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물로 가득 채워진 새빨간 고무다라이 속으로 내 머리통을 푹 담근다. 머리를 따라 목과 어깨와 팔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전에 뺨을 맞고 울던 나는 호흡이 가빴었기에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없었다. 폐 속에 남아있던 모든 공기가 빠져나간다. 혼자서 얼굴을 세숫대야 물에 담그며 잠수놀이를 할 때는 잘만 들리던 보글보글 공기방울 소리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숨을 내뱉을 수 없어 물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쉰다. 하지만 공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코와 입으로 차가운 수돗물만 잇따라 들어올 뿐이다. 아무리 팔다리를 움직이며 버둥대도 내 다리보다 긴 고무다라이 아래 땅바닥으로 발을 디딜 수 없다. 머리에 힘을 주어 물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 2025. 1. 31.
[지네한테 물린 날] 산이 초록빛이던 여섯 살의 어느 초여름 날이었어. 엄마와 함께 집 뒤편에 있는 감자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어. 옆에는 실외기가 있었는데, 10만 원짜리 에어컨이 뭐 저리 시끄럽게 쌩쌩 돌아가는지. 아니, 저렴한 싸구려라서 저렇게 소리가 컸던 걸까. 뜨거운 실외기 바람을 피해 쪼그려 앉아 쇠숟가락으로 화분을 쏘삭거렸어. 화분 속에서 콩벌레도 나오고 개미도 나왔어. 난 곤충을 손으로 가지고 놀 정도로 좋아해서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가 비닐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끼고 흙을 정리하고 있었어.   난 맨손이 편한데. 비닐장갑 답답한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흙을 퍼내는데 지네가 나오더라. 까맣고 길다란 몸에 수십 쌍의 빨간 다리를 가진 지네. 그림책에서만 보던 지네를 실제로 본 나는 그게 참 신기했어. 손으.. 2025. 1. 30.
[기억 속의 아버지] 집에 창문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았던 봄날이었다. 유난히 그날따라 창에서 햇살이 밝게 들어왔다.  툭. 툭.   일어나.   자다 말고 엄마가 삼 형제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집을 떠날 거라는 것을 나는 엄마의 복장을 통해 눈치챘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옷을 주워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엄마가 문 밖으로 나가고 형도 문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 아빠만 남겨두고 내가 부엌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화가 나지 않은 표정의 아빠였다. 아빠는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못 나가도록 팔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다섯 살짜리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아빠는 나에게 사탕을 쥐어줬다.  옛날에 .. 2025. 1. 30.
[쌈지마당]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 2025. 1. 30.
[천포대기] 일찍 잠에 들었다가 소변이 마려워 부엌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슬리퍼를 신고 부엌에 쪼그려 앉아 계신다. 참방참방 쪼르르르- 천을 물에 헹군 뒤 비틀어 짜자 때국물이 세숫대야로 떨어진다. 세숫대야를 기울여 더러워진 물들을 하수구로 흘려보내신다. 엄마방이라고 불렀던 작은 방은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위아래 내복바람으로 중간 문턱에 서서 엄마를 바라본다. 잠에서 덜 깬 듯 작은 단풍낙엽 같은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린다. 어머니가 부엌을 다 사용하실 때까지 기다린다. 시곗바늘은 숫자 9를 가리키고 있다. 부엌문틈 사이로 건조한 한기가 밀려들어온다. 내복으로 덮이지 않은 발등과 손등, 눈코입이 시리다. 찬바람은 내게 왜 잠에서 깼냐고, 얼른 다시 들어가서 누워 자라고 보챈다. 어린 인기척에 어머니는 뒤를 돌아.. 2025.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