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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32

[물벼락] 어머니가 나의 뒷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물로 가득 채워진 새빨간 고무다라이 속으로 내 머리통을 푹 담근다. 머리를 따라 목과 어깨와 팔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전에 뺨을 맞고 울던 나는 호흡이 가빴었기에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없었다. 폐 속에 남아있던 모든 공기가 빠져나간다. 혼자서 얼굴을 세숫대야 물에 담그며 잠수놀이를 할 때는 잘만 들리던 보글보글 공기방울 소리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숨을 내뱉을 수 없어 물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쉰다. 하지만 공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코와 입으로 차가운 수돗물만 잇따라 들어올 뿐이다. 아무리 팔다리를 움직이며 버둥대도 내 다리보다 긴 고무다라이 아래 땅바닥으로 발을 디딜 수 없다. 머리에 힘을 주어 물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 2025. 1. 31.
[지네한테 물린 날] 산이 초록빛이던 여섯 살의 어느 초여름 날이었어. 엄마와 함께 집 뒤편에 있는 감자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어. 옆에는 실외기가 있었는데, 10만 원짜리 에어컨이 뭐 저리 시끄럽게 쌩쌩 돌아가는지. 아니, 저렴한 싸구려라서 저렇게 소리가 컸던 걸까. 뜨거운 실외기 바람을 피해 쪼그려 앉아 쇠숟가락으로 화분을 쏘삭거렸어. 화분 속에서 콩벌레도 나오고 개미도 나왔어. 난 곤충을 손으로 가지고 놀 정도로 좋아해서 무섭지 않았지만, 엄마가 비닐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끼고 흙을 정리하고 있었어.   난 맨손이 편한데. 비닐장갑 답답한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흙을 퍼내는데 지네가 나오더라. 까맣고 길다란 몸에 수십 쌍의 빨간 다리를 가진 지네. 그림책에서만 보던 지네를 실제로 본 나는 그게 참 신기했어. 손으.. 2025. 1. 30.
[기억 속의 아버지] 집에 창문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았던 봄날이었다. 유난히 그날따라 창에서 햇살이 밝게 들어왔다. 툭. 툭. 일어나. 자다 말고 엄마가 삼 형제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집을 떠날 거라는 것을 나는 엄마의 복장을 통해 눈치챘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옷을 주워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엄마가 문 밖으로 나가고 형도 문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 아빠만 남겨두고 내가 부엌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화가 나지 않은 표정의 아빠였다. 아빠는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못 나가도록 팔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다섯 살짜리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아빠는 나에게 사탕을 쥐어줬다. 옛날에 .. 2025. 1. 30.
[쌈지마당]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 2025. 1. 30.
[천포대기] 일찍 잠에 들었다가 소변이 마려워 부엌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슬리퍼를 신고 부엌에 쪼그려 앉아 계신다. 참방참방 쪼르르르- 천을 물에 헹군 뒤 비틀어 짜자 때국물이 세숫대야로 떨어진다. 세숫대야를 기울여 더러워진 물들을 하수구로 흘려보내신다. 엄마방이라고 불렀던 작은 방은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위아래 내복바람으로 중간 문턱에 서서 엄마를 바라본다. 잠에서 덜 깬 듯 작은 단풍낙엽 같은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린다. 어머니가 부엌을 다 사용하실 때까지 기다린다. 시곗바늘은 숫자 9를 가리키고 있다. 부엌문틈 사이로 건조한 한기가 밀려들어온다. 내복으로 덮이지 않은 발등과 손등, 눈코입이 시리다. 찬바람은 내게 왜 잠에서 깼냐고, 얼른 다시 들어가서 누워 자라고 보챈다. 어린 인기척에 어머니는 뒤를 돌아.. 2025. 1. 30.
[분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멧새들의 대화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다섯 시의 검푸른 어스름은 여름날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아빠방에서 몰래 엄마방으로 넘어와 높다란 선반 위에 있는 분유통을 바라본다. 앱솔루트. 그 분유통의 몸통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방에 있는 빨래의자를 찾는다. 그리고는 곤히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몰래 둔다. 그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두 손으로 분유통을 꺼내 품에 안는다. 왼팔로는 분유통을 붙들고 오른팔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살살 돌린 뒤 작은 계량숟가락으로 분유를 크게 떠 입으로 가져다 넣는다. 계량숟가락을 분유통 안에 내던지듯이 놓고 뚜껑을 닫는다.   침샘에서 침이 흘러나오면서 귀 아래가 .. 2025. 1. 30.
[첫 기억] 어둠이 내린 불암산 둘레길 주변, 무릎 높이의 화강암 돌담 위에 서서 울고 있었다. 형과 동생은 엄마의 도움으로 돌담을 내려갔다. 어머니는 양손으로 형과 동생의 손을 잡은 채 내게 얼른 내려오라며 보챈다. 그 높이가 참 무서웠다. 엄마.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어머니를 바라보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얼굴 뒤로 비치는 붉은 가로등 불빛이 눈물에 기다랗게 번져 내게 들어온다. 아버지도 얼른 내려오라며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맞기는 더더욱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화강암 돌담 위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이내 울음도 멈췄다. 잘했어. 우리 인니 잘했어. 어머니가 말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두려움을 넘.. 2025. 1. 30.
49재 - 칠재 양초 아래에 적힌 '소원성취' 네 글자가 검게 타들어간다. 양초는 짧아져 초꽂이 부분이 삐죽 튀어나왔다. 손바람으로 촛불을 끈 뒤 촛농이 굳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심지에서 탄내가 올라와 코를 자극한다. 굳은 양초를 들어내 새 양초로 바꾼다. 둥근 몸 한가운데 구멍이 나버린 차갑게 식어버린 양초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잘게 잘라 다시 쓰기로 한다.* 너는 어머니가 쓴 글들을 정리한다. 꽃들과 나무를 보며 적은 시들과 아무리 기원해도 수신자에게 닿을 수 없는, 어머니가 적은 모든 편지들을 옮겨 적는다. 엄마가 쓴 글들 모두 모아서 책 한 권 내보면 어떨까? 네. 그럴게요. 엄마 유명해지시겠네. 돈도 많이 버시겠어요. 그러냐? 그래도 난 우리 삼 형제가 좋다. 우리끼리 살자. 언제쯤 우리 예쁜 삼 형.. 2025. 1. 17.
49재 - 육재 승강기를 타고 22층으로 올라간다. 22층까지는 삼십 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복도 제일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집 현관 앞에서 멈춰 선다. 청명이가 익숙하게 똑 똑 노크를 하는 동안, 너는 천천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현관문을 열자 큰방 문틀 너머로 허름한 갈색 면바지에 얼룩무늬 군야상 옷차림의 스님이 보였다. 스님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너와 청명이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스님. 어, 왔나. 어서 들어와 앉아. 스님은 정오가 되도록 아무것도 들지 않고 방바닥에 앉아 햇호두와 피땅콩만 까고 있었다. 지난번에 사다 놓은 쌀과자의 포장지가 벗겨져 있는 것을 눈치챈 너는 안심한 듯 별안간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방 안은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집 안에 .. 2025.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