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구재27 [분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멧새들의 대화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다섯 시의 검푸른 어스름은 여름날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아빠방에서 몰래 엄마방으로 넘어와 높다란 선반 위에 있는 분유통을 바라본다. 앱솔루트. 그 분유통의 몸통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방에 있는 빨래의자를 찾는다. 그리고는 곤히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몰래 둔다. 그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두 손으로 분유통을 꺼내 품에 안는다. 왼팔로는 분유통을 붙들고 오른팔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살살 돌린 뒤 작은 계량숟가락으로 분유를 크게 떠 입으로 가져다 넣는다. 계량숟가락을 분유통 안에 내던지듯이 놓고 뚜껑을 닫는다. 침샘에서 침이 흘러나오면서 귀 아래가 .. 2025. 1. 30. [첫 기억] 어둠이 내린 불암산 둘레길 주변, 무릎 높이의 화강암 돌담 위에 서서 울고 있었다. 형과 동생은 엄마의 도움으로 돌담을 내려갔다. 어머니는 양손으로 형과 동생의 손을 잡은 채 내게 얼른 내려오라며 보챈다. 그 높이가 참 무서웠다. 엄마.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어머니를 바라보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얼굴 뒤로 비치는 붉은 가로등 불빛이 눈물에 기다랗게 번져 내게 들어온다. 아버지도 얼른 내려오라며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맞기는 더더욱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화강암 돌담 위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이내 울음도 멈췄다. 잘했어. 우리 인니 잘했어. 어머니가 말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두려움을 넘.. 2025. 1. 30. 49재 - 칠재 양초 아래에 적힌 '소원성취' 네 글자가 검게 타들어간다. 양초는 짧아져 초꽂이 부분이 삐죽 튀어나왔다. 손바람으로 촛불을 끈 뒤 촛농이 굳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심지에서 탄내가 올라와 코를 자극한다. 굳은 양초를 들어내 새 양초로 바꾼다. 둥근 몸 한가운데 구멍이 나버린 차갑게 식어버린 양초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잘게 잘라 다시 쓰기로 한다.* 너는 어머니가 쓴 글들을 정리한다. 꽃들과 나무를 보며 적은 시들과 아무리 기원해도 수신자에게 닿을 수 없는, 어머니가 적은 모든 편지들을 옮겨 적는다. 엄마가 쓴 글들 모두 모아서 책 한 권 내보면 어떨까? 네. 그럴게요. 엄마 유명해지시겠네. 돈도 많이 버시겠어요. 그러냐? 그래도 난 우리 삼형제가 좋다. 우리끼리 살자. 언제쯤 우리 예쁜 삼형제랑.. 2025. 1. 17. 49재 - 육재 승강기를 타고 22층으로 올라간다. 22층까지는 삼십 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복도 제일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집 현관 앞에서 멈춰선다. 청명이가 익숙하게 똑 똑 노크를 하는 동안, 너는 천천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현관문을 열자 큰방 문틀 너머로 허름한 갈색 면바지에 얼룩무늬 군야상 옷차림의 스님이 보였다. 스님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너와 청명이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스님. 어, 왔나. 어서 들어와 앉아. 스님은 정오가 되도록 아무것도 들지 않고 그저 방바닥에 앉아 햇호두와 피땅콩만 까고 계셨다. 지난 번에 사다놓은 쌀과자의 포장지가 벗겨져 있는 것을 눈치챈 너는 안심한 듯 별안간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방 안은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집 안.. 2025. 1. 8. 49재 - 오재 굳게 닫힌 반지하 원룸 창을 비집고 희미하게 맷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켜져 있던 보일러 때문일까, 작은 방에 두 명이 들어앉아 있던 탓일까, 방 안은 훈기로 가득했다. 침대 위로 청명이가 몸을 던졌다. 이내 몸을 똑바로 돌리고 스마트폰을 만지기 시작한다.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누워 너는 어둑한 천장을 바라본다. 재잘거리던 맷새들의 대화소리가 이내 끊어졌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고요한 숨소리만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바닥이 참 따뜻하다. 아무것도 덮지 않아도 몸이 후끈했다. 긴 침묵에 까무룩이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이 감기던 찰나 청명이가 입을 열었다. 올해까지만 살려고 했었어. 너는 놀라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고서 '했었어'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짚는다. 겉으로는 힘든 내색 하나 없.. 2025. 1. 2. 49재 - 사재 너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펼치고 모로 눕는다.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고는 팔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긴다. 베개 없이 눕는 것이 편한 너는 왼팔을 접어 머리 아래 받친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뱉는다. 며칠 전부터 이유 없이 숨이 가빠와 심호흡을 하곤 했다. 초점 없는 눈은 허공을 향한다.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조금 전 앉아있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양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너는 발 시려오는 줄 모르고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너는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비워낸 채로 십 분 가까이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사진 속 백발 여인을 바라본다. 너는 잠시 잊고 있었다. 삼 주일이 지난 지금 그녀의 기억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과 한때 폭.. 2024. 12. 25. 49재 - 삼재 소원성취 양초에 불을 붙이고 괜히 양초 몸을 어루만진다. 너는 끝자락부터 천천히 녹아가는 양초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양초가 타고 있을 동안에는 양초 주변의 냄새를 잡아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양초와 향을 함께 태우면 향내가 덜 나는 것도 같았다. 양초 너머에 있는 영정사진을 또 한참 바라본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보고 싶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나면 어느새 목이 매어왔다. 엄마를 부르는 동안에는 나이 든 어른도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는 시를 기억한다. 밝게 웃다가도 섧게 울고 좋다가 했다가도 싫다고 투정하고. 너도 그랬을까.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했을 어머니에게, 너도 그렇게 철없이 세월을 흘려보냈을까. 숨이 가빠.. 2024. 12. 17. 49재 - 이재 초강대왕님이시여. 인사드리옵니다. 상산 김씨 김 혜선의 둘째아들 최 영명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초강대왕님께 불리어 화탕지옥 앞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이 하나 있사오니, 부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어 어머니께 아무런 벌도 내리지 말아주시옵소서. 64년 일평생을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불도를 닦아오신 사람입니다. 혹여 어머니께서 지은 죄가 있다면 제가 받겠습니다. 제가 괴롭지 않겠냐구요. 괜찮습니다. 제가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불지옥에 떨어져 영겁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견디고 버티겠습니다. 부탁드리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밖으로 두껍게 껴입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찰나의 시간에 그 사람들은 네 세상에서 사라진다. 잠시 보였던 그들은, 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된다. 깊은 한숨을 .. 2024. 12. 10. 49재 - 초재 너는 사십구재를 지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번의 제사를 통해 슬픔을 달래야 한다.초재날 저녁 새하얀 함박눈이 내렸다. 다음 날에 발목 높이로 쌓인 눈을 보고 사람들은 오늘 첫눈이 내렸다고 말하지만, 오늘이 첫눈이 내린 날이 아니다. 소설절 여러 날이 지난 어젯밤 첫눈이 내려 쌓이기 시작했다. 너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내리는 눈을 피한다거나 검정 코트 어깨부분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도 않는다. 흩날리는 눈들 사이로 옛추억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머리칼이 눈들에 적셔지고 너는 다시 그 아픈 기억들을 고스란히 품어안는다. 마치 벌을 받듯이, 그래야만 금생에 효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듯이. 초재 함박눈 내리는 하얀 길을 걷는다. 느리게 떨어지는 눈이 너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주머니에서 .. 2024. 11. 29.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