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792 [기억 속의 아버지] 집에 창문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았던 봄날이었다. 유난히 그날따라 창에서 햇살이 밝게 들어왔다. 툭. 툭. 일어나. 자다 말고 엄마가 삼 형제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집을 떠날 거라는 것을 나는 엄마의 복장을 통해 눈치챘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옷을 주워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엄마가 문 밖으로 나가고 형도 문 밖으로 나갔다. 집 안에 아빠만 남겨두고 내가 부엌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화가 나지 않은 표정의 아빠였다. 아빠는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못 나가도록 팔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다섯 살짜리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아빠는 나에게 사탕을 쥐어줬다. 옛날에 .. 2025. 1. 30. [쌈지마당]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사람인변, 두인변, 받침, 제부수 등 손수 한자 부수들을 표로 만든 뒤 코팅하여 우리 형제들에게 하나씩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천자문과 사자소학은 어린 삼 형제들의 교재였다. 날이 좋을 때는 불암산 산속이나 쌈지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구름이 잔뜩 낀 짙은 날이면 집에서 우리 삼 형제는 늘 어머니와 함께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공부하였다. 집이 학당이었고 어머니가 선생님이었고 우리들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별 진, 잘 숙, 벌일 렬, 베풀 장. 느티나무 고목이 그려낸 커다란 그늘이 시원하다. 불암산 너머로부터 실.. 2025. 1. 30. [천포대기] 일찍 잠에 들었다가 소변이 마려워 부엌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슬리퍼를 신고 부엌에 쪼그려 앉아 계신다. 참방참방 쪼르르르- 천을 물에 헹군 뒤 비틀어 짜자 때국물이 세숫대야로 떨어진다. 세숫대야를 기울여 더러워진 물들을 하수구로 흘려보내신다. 엄마방이라고 불렀던 작은 방은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위아래 내복바람으로 중간 문턱에 서서 엄마를 바라본다. 잠에서 덜 깬 듯 작은 단풍낙엽 같은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린다. 어머니가 부엌을 다 사용하실 때까지 기다린다. 시곗바늘은 숫자 9를 가리키고 있다. 부엌문틈 사이로 건조한 한기가 밀려들어온다. 내복으로 덮이지 않은 발등과 손등, 눈코입이 시리다. 찬바람은 내게 왜 잠에서 깼냐고, 얼른 다시 들어가서 누워 자라고 보챈다. 어린 인기척에 어머니는 뒤를 돌아.. 2025. 1. 30. [분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멧새들의 대화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다섯 시의 검푸른 어스름은 여름날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아빠방에서 몰래 엄마방으로 넘어와 높다란 선반 위에 있는 분유통을 바라본다. 앱솔루트. 그 분유통의 몸통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방에 있는 빨래의자를 찾는다. 그리고는 곤히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몰래 둔다. 그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두 손으로 분유통을 꺼내 품에 안는다. 왼팔로는 분유통을 붙들고 오른팔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살살 돌린 뒤 작은 계량숟가락으로 분유를 크게 떠 입으로 가져다 넣는다. 계량숟가락을 분유통 안에 내던지듯이 놓고 뚜껑을 닫는다. 침샘에서 침이 흘러나오면서 귀 아래가 .. 2025. 1. 30. [첫 기억] 어둠이 내린 불암산 둘레길 주변, 무릎 높이의 화강암 돌담 위에 서서 울고 있었다. 형과 동생은 엄마의 도움으로 돌담을 내려갔다. 어머니는 양손으로 형과 동생의 손을 잡은 채 내게 얼른 내려오라며 보챈다. 그 높이가 참 무서웠다. 엄마.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어머니를 바라보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얼굴 뒤로 비치는 붉은 가로등 불빛이 눈물에 기다랗게 번져 내게 들어온다. 아버지도 얼른 내려오라며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맞기는 더더욱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화강암 돌담 위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이내 울음도 멈췄다. 잘했어. 우리 인니 잘했어. 어머니가 말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두려움을 넘.. 2025. 1. 30. 위로 아무 말 없이 그냥꼬옥안아주세요2025.01.29. 2025. 1. 29. 한남대로 대통령 관저 앞 (2025.01.15.) 2025. 1. 27. 노란 국화 카메라를 들었다플라스틱 물병에 꽂힌 노란 국화를 렌즈에 담는다예쁘다, 너 예쁘다말하고는 한참을 바라본다시들기 전에이 말을 해줬어야 했을까노란 잎이 마르기 전에한 번이라도 더 손길을 건넸어야 했을까2025.01.23. 2025. 1. 24. 49재 - 칠재 양초 아래에 적힌 '소원성취' 네 글자가 검게 타들어간다. 양초는 짧아져 초꽂이 부분이 삐죽 튀어나왔다. 손바람으로 촛불을 끈 뒤 촛농이 굳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심지에서 탄내가 올라와 코를 자극한다. 굳은 양초를 들어내 새 양초로 바꾼다. 둥근 몸 한가운데 구멍이 나버린 차갑게 식어버린 양초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잘게 잘라 다시 쓰기로 한다.* 너는 어머니가 쓴 글들을 정리한다. 꽃들과 나무를 보며 적은 시들과 아무리 기원해도 수신자에게 닿을 수 없는, 어머니가 적은 모든 편지들을 옮겨 적는다. 엄마가 쓴 글들 모두 모아서 책 한 권 내보면 어떨까? 네. 그럴게요. 엄마 유명해지시겠네. 돈도 많이 버시겠어요. 그러냐? 그래도 난 우리 삼형제가 좋다. 우리끼리 살자. 언제쯤 우리 예쁜 삼형제랑.. 2025. 1. 17. 마음정리 몇 달 만에 쓰는 다이어리다.짧은 세월 속에 마음을 돌보지 못하였다.오늘 짧게나마 내 마음을 어루만지기로.요즘은 무념 무상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골목길 사이를 지나치는 떠돌이 개처럼.담벼락 위에 앉아 햇빛을 즐기는 고양이처럼.소쩍새 울음소리가 그리운 밤이다.켜켜이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그리워지는 밤이다.하늘 가운데 하얗게 동그랗게 뜬 달이구름 한 점 없는 까닭에 더 외로워 보이는 밤이다.진실하고 너그럽게부드럽고 겸손하게그렇게 살자.오욕락에 물들지 않고그저 지구 위를 살아가는 한 작은 생명체로서외로이 살다 무거운 짐 아픈 추억 어깨에 싣고홀연히 사라지자. 2025. 1. 17. 한남대로 앞, 2030 애국자들 (2025.01.06.) 한남대로 관저 앞.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수많은 2030 연사들 젊은 2030 연사들의 자유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가 해가 넘어가고 밤이 되도록 끊이질 않았다. 탄핵 반대 시위 2030 연사들 주 연사 내용...처음에는 계엄령이 당황스러웠으나, 계엄령의 이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의 입법독재와 폭주 등을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대통령의 큰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셨습니다. ... ...대학교에서 단순히 암기만 잘하는 것이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멍청한 것입니다. 어떠한 정보를 들었을 때,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자신이 한 번 더 생각하여 과연 이게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입니다. 누가 내란을 저지.. 2025. 1. 16. 흰 - 한강 흰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흰』. 2018년 맨부커 인터네셔널 부문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2013년 겨울에 기획해 2014년에 완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글의 매무새를 닳도록 만지고 또 어루만져서 2016년 5월에 처음 펴냈던 책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한 권의 시집으로 읽힘에 손색이 없는 65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달,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저자한강출판문학동네출판일2018.04.25 2025. 1. 16. 이전 1 ··· 5 6 7 8 9 10 11 ··· 6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