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쇼펜하우어 말을 되뇌었다.
과거에 대한 불만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행복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잘 살아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과거에 대한 불만 없이
나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기회나 행복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아팠다고 해서 그것에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된 이후로 항상 이 말을 되뇌이고
이렇게 살아오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랑이든, 직장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무엇에 대해서든 나는 현재에 집중하려 애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아닌
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더이상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나
명예나 돈, 우정, 야망 등에 욕심이 없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잘 살기는 바라지도 않아.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당신은 이미 생의 후반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미 살아오고 있는 나는, 애늙은이일까.
고통이 없고 기쁨이 없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상태이다.
행복하고 싶다는 사람들.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생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으므로 생존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이자 깨달음일 수 있다.
내가 항상 바라온 것.
죽음.
삶은 덧없는 것.
아무 의미 없는 것.
현명한 사람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노년기의 지혜를 예견하고 운명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허망한 삶을 다 보낸 후에야 선각자의 말을 깨닫고 가슴을 친다.
내 삶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젊은 나이일까, 노년일까.
작가나 화가나 음악가들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면서 행복을 묘사할 때
전원적, 목가적 자연 풍경과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을 보아도 인간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행복을 묘사할 때 늘 한적한 시골과 자연 풍경과 외로움과 고요함을 찬미하고 있지 않은가.
예술가들은 단조로움과 단순함이 행복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 그것만이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단순하고 단조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적인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권태라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쯤 되면 나도 예술가가 아닌가.
내면적 자아가 공허한 사람일수록 외부에서 끝없는 자극을 구한다.
그는 외부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 파멸한다.
우리는 그것을 악기에 비유할 수 있다.
단음을 가진 악기는 교향악단에서 다른 악기들과 함께 연주되어야만 그 역할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피아노는 심포니의 한 부분이 아니라 독주를 통해서 나름대로 작은 음악적 세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교향악단의 주인공이 되어 다른 악기들의 반주를 거느릴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을 즐길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고독이라 하면 쓸쓸함, 외로움, 소외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면서까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주변에 자신을 맞추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즁요한 일은 나답게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나만의 길은 내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인생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
때로는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보자.
고독해질수록 세상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에게서 또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나.
나 자신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내게 남겨진 탐구의 주제다.
-장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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