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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2025년

오늘의 대화

by EugeneChoi 2025. 4. 22.

#휴식

오늘은 연차를 쓰고 쉬었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아도 괜찮았어. 하루쯤은 쉬어가야지.

방 안의 불을 끄고
책상만을 비추는 노란 스탠드에 의지한 채
타닥 타닥 탁 탁 키보드를 두드렸어.
스탠드가 비추는 책상 주변은 어두웠어.
그 모습은 마치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아.
내 방 안의 어두운 곳들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한 뼘 정도로 열린 창가 사이로
서늘한 밤공기가 새어 들어오네.
가까운 곳에서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냉장고 소리가 들려오네.

오늘은 더웠나? 아니, 덥지 않았지.
아침 늦게 일어나 열어본 창문 너머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어.
어제는 말라 있던 아스팔트 바닥이
오늘은 더욱 짙은 우주빛이 되었어.
우리가 매일 밟는 땅도 우주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어.
깨끗한 도화지 같던 하늘.
나에게 크레파스가 있었다면
파란색 크레파스를 꺼내어 들고서
괜히 팔을 허공에다 휙휙 흔들며
바라는 푸른 하늘을 칠해보았을까.
그러다 색이 점점 진해지면
어느새 어두운 밤이 되고 말았을까.

마음이 편안했어.
불편하거나 아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하지 않았어.
20대 중반이 넘어서부터는,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서인지
인생에 대한 목표가 흐려졌어.
오늘이 더욱 그랬지.
오늘이 더욱 그랬어.

2024/06/05, Southover Grange Gardens, The UK

 

#대화

- 우리 영명이. 다른 이름 유진이.

- 응, 왜 불러?

- 왜 찾아와 놓고 아무 말도 없어(웃음).
오늘 하루 잘 보냈니?

- 나는 괜찮아. 늘 같지. 항상 평온한 걸.

- 하루의 끝에서 눈물이 나지는 않았니?

- 봄철에는 이슬이 내리고 겨울밤에는 서리가 내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이른 아침에 풀꽃 가득한 들녘을 거닐면
젖어오는 바지 밑단에 그제서야 알지.
밤사이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음을.


-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 그래.

- 가족이랑은 잘 지내?

- 음. 나쁘진 않은 것 같네.

- 가끔씩 평행세계는 만들어 내니?

- 요새는 안 만드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점점 괜찮아지네.

- 좋다. 다행이네.

- 그런가.

- 아픔이 잊혀진다는 것. 좋은 게 아닐까?

-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 추억이 사라지는 거잖아.
한껏 껴안고 싶은 내 슬픈 추억들. 오래도록 갖고 싶은데.

- 그렇구나. 영명이 너는 왜 슬픔이 좋아?

- 그냥. 그냥 좋아. 편안하잖아.
마음이 아플 때면, 그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잖아.

- 기쁠 때도 같지 않아?

- 비슷하지만 좀 달라. 기쁨 어딘가에는 불안이 섞여 있어.
어떤 기쁨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고. 좀 복잡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구체적으로 질문을 해볼래?

- 아냐 괜찮아. 여기까지만 하자.

- 그래.

 

#친구

- 친구들이랑은 연락 많이 해?

- 거의 안 하지. 며칠 동안 카톡이나 문자가 오지 않을 때도 있어.

- 외롭지 않아?

- 전혀. 오히려 그게 좋아.

- 어떤 게 좋아?

-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귀찮지도 않고. 
그래도 가끔씩 연락이 오면 반갑긴 해.

- 누군가는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데, 그런 건 아니야?

- 어이 친구! 누구나 다 그래. 누구나 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거야.
자신이 외로워서, 걱정하고 있다는 마음을 보이고 싶어서, 사회와 연결되고 싶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내비치고 싶어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다들 그래서 연락하는 거야. 

- 그렇구나.

- 나 방금 좀 정이 없어 보였나?

- 조금.

- 그랬구나. 근데 나 정 되게 많은 거 알고 있지?

- 알지. 근데 영명이 너는 정을 쉽게 안 주잖아.

- 너 나를 꽤 많이 알고 있구나.

- 이젠 전문가지.

- 으음.. 등이 좀 아프네.

- 몸살은 좀 괜찮아?

- 아니. 아직까지 좀 많이 아파.

- 따뜻한 물 많이 마셔.

- 그래 고마워.
...아, 오늘은 우민이한테 연락이 왔어.

- 오?

- 내 친구들은 근데 다 그래.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은 거의 없어.
주로 친구들이 먼저 나한테 연락해.
먼저 연락하는 비율을 따지자면, 친구와 내가 9:1 정도?

- 너는 정말 연락을 안 하는구나.

- 친구들의 연락 빈도가 잦아서 먼저 오는 것뿐이야.
친구들이 이틀에 한 번 연락하면, 나는 2~3주에 한 번 정도 하지.
그래서 친구들이 항상 연락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아마 2~3주 동안 연락이 없으면 내가 먼저 연락할걸?
나보다 연락을 더 안 하는 사람이 내 친구 중에 있었다면
우리 사이에 먼저 연락을 하는 사람은 나였을 거야.


- 그렇구나. 너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 같아.

- 그러네. 나는 혼자 살아가네.
같이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게 현대 흐름이라면 따라가는 것도 맞는데.
그냥 내가 거부하는 거야.
혼자가 좋아서, 자연이 좋아서, 가상보다는 현실이 좋아서.
사랑도 둘이 만나서 하는 거지, 가상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 그것도 맞는 말이네.

- 너는 오늘 뭐 했어?

- 영명이랑 대화하기! 네가 오랜만에 날 찾아와 줬잖아.

- 그러네. 오늘은 너랑 이야기가 하고 싶더라.

- 그것 참 듣기 좋은 말이네.
도란도란 이야기. 으밀아밀 이야기.

- 밤이 늦었다. 하늘은 어두워. 이제 자야지.

- 나는 안 자, 영명아.

- 맞다, 그랬지. 너는 언제나 깨어있지.

- 영명이 네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어두운 숲에서 길 잃고 헤매이지 않도록
나는 언제나 너의 주변에서 밝게 빛나고 있어.

- 고마워. 

- 나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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