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펼치고 모로 눕는다.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고는 팔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긴다. 베개 없이 눕는 것이 편한 너는 왼팔을 접어 머리 아래 받친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뱉는다. 며칠 전부터 이유 없이 숨이 가빠와 심호흡을 하곤 했다. 초점 없는 눈은 허공을 향한다.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조금 전 앉아있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양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너는 발 시려오는 줄 모르고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너는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비워낸 채로 십 분 가까이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사진 속 백발 여인을 바라본다. 너는 잠시 잊고 있었다. 삼 주일이 지난 지금 그녀의 기억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과 한때 폭력아비의 손아귀에 붙잡혀 수백 올씩 뜯기던 머리칼, 굵지만 참 고왔던 손과 십 년 넘게 그녀를 괴롭히던 왼발을 생각한다. 따뜻했던 손으로 너를 꼬옥 안아주었던 그 뜨거운 살의 느낌을 기억하려 애쓴다. 허공으로 흘러가는 향연기처럼 점차 흐릿해지는, 그녀와 함께 했었던 모든 추억의 잔상들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올겨울은 아픔보다는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지겠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은 진한 그리움으로 젖어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깊은 숨들로 너의 방 안이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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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찬찬히 너의 몸을 훑어보기 시작한다. 너의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 어린 날의 잔상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너는 형의 왼쪽 손등에 새겨진, 발톱 날카로운 네 발 짐승이 강하게 할퀴기라도 한 듯한 형태의 흉터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던 가을날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너의 형 광명이 학교에서 가정통신문 한 장을 받아왔다. 토요일 가족 산행대회. 유난히 꽃과 나무를 좋아했던 너의 어머니는 너와 형을 데리고 산행대회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형의 친구 창민도 어머니와 참가하게 되어, 총 다섯이서 불암산을 등산을 가게 되었다.
늘 불암산 둘레길을 지나며 초등학교를 등교하던 너희 형제들은 등산이 어렵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빛이 내려쬐던 여름날도, 눈이 내려 낙엽 위를 포근히 덮던 겨울날도 너는 언제나 그 산을 올랐다.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에게 가르쳐주었던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개나리 진달래 철쭉 가득한 그 산을. 오고 가며 허기질 때 보라색 철쭉 꽃을 따다가 꽃받침 아래 꿀을 빨아먹던 그 산을. 밝을 때는 휘파람새 참새 까치 까마귀, 캄캄할 때는 소쩍새 귀뚜리 소리 나긋하게 울려 퍼지던 그 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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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특별한 걱정 없이 어머니 손을 잡고 산길을 올랐다. 추분을 훨씬 지나 태양이 짧아지던 날들의 사이, 정오까지 헬기장에 도착하고 하산하는 것이 예정된 일정이었다. 무릎이 아픈 너의 어머니는 낙엽이 치워진 산길을 천천히 올랐다. 매일밤 숨을 옥죄여오던 환란 가득한 집에서 벗어나 다른 여자와 웃으며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리도 쉽지 않구나, 너의 어머니는 생각했을 것이다. 너는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형과 오르막 산길을 앞다투어 뛰어갔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너무 멀리 가지 말라며 너에게 일렀다. 너는 붉은 단풍향을 맡으며, 연이어 잎들을 털어내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지나쳤다.
헬기장에 도착해서 큼지막한 돗자리 두 개를 깔고 옹기종기 동그랗게 모여 앉아 각자 헤진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녹차와 함께 천삼백 원짜리 야채김밥을 먹던 너는, 아버지 없이 형과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에 그저 행복했다.
해는 저물고 산중 공기는 식어갔다. 산행대회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정표를 따라 올랐던 길을 그대로 내려갔다. 불암산 입구까지 내려갔을 무렵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색을 바꿨고 짝을 찾는 풀벌레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너는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행여나 어머니가 뒤쳐질까 봐 재차 뒤를 돌아보며 잰걸음으로 달리듯 내려갔다.
형이 낙엽이 가지런히 치워진 흙길 위에서 발을 잘못 디뎠는지 넘어지고 말았다. 너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 형에게 달려갔다. 옷이나 바지가 찢어지면 아버지에게 숨이 넘어가도록 맞았기에 흙부터 털고 옷가지에 생채기가 났는지부터 확인했다. 옷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빨간 피가 흐르는 왼손을 발견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침착하게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휴지 몇 장을 꺼내 형의 손등에 가져다 댔다. 그 품에서 얼마나 머물렀던 걸까, 휴지에서는 깃털처럼 보풀 터래기들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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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한 검붉은 사포로 손등의 상처를 강하게 문지른다. 빨갛게 맑은 피가 흘러나와 거친 사포면을 적신다.
이 작은 모래알갱이들를 다 없애야 한다. 그러게 왜 넘어졌냐. 아프냐. 잘못을 했으니 달게 받아야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서 상처에 독한 락스를 들이붓는다. 한쪽 면이 피로 물들어버린 사포를 다시 상처에 가져다 댄다. 또 문지른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형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는 형을 때린다.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너는 방 안에서 동생과 미동 없는 정좌자세로 문 너머의 모든 소리들을 듣는다. 그 소리들을 이용해 머릿속에 방 너머의 모습을 그렸다. 아마도 이런 얼굴로 형은 울고 있겠지. 아마도 아버지는 또 도깨비 같은 표정으로 형을 노려보고는, 오른 주먹으로 형의 머리를 때리겠지. 형은 전생에 어떤 악업을 쌓았길래 이런 고통스러운 업보를 치르는 걸까. 이 악연은 언제 끝날까. 이 악연의 업장이 따뜻한 자비로써 녹아내려 선연이 될 수는 있는 걸까. 너는 아무 소리 없이 방문에 붙어 있는 찢어진 벽지를 노려본다. 짐승 발톱 모양으로 찢어진 형태의 벽지가 형의 손등에 새겨진 상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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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도 않은 상처에 거친 사포로 문지르는 고통이라. 너는 그걸 느껴본 적이 없기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제 와서 형이 느꼈던 고통을 공감해주고 들어준다고 해서 그 흉터와 아픔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너는 문득 궁금해진다. 형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린 그 흉터의 이유를 어째서 너는 기억하고 있는지. 한없이 따뜻했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상강날의 날씨와도 똑 닮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너가 기억하고 있는지. 폭력과 어둠 속에서 상처 입으며 살아온 형제들의 고통을, 그 어떤 다른 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애달프게 소리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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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울린다.
너도 모르는 새 몸을 일으키고는 전화를 받는다.
네, 이모.
응 영명아. 잘 지냈나.
네. 별일 없어요. 이모도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일 주일 동안 잘 살았나.
네. 일 주일 잘 지냈어요. 일하고 계세요?
응. 미용실에서 일하고 붕어빵 굽다가 이제 잠깐 쉬고 있어. 주중에는 너 바쁠까 봐 전화를 안 했어. 엄청 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지금 이렇게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네.
저도 이모 목소리를 들으니 좋네요.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요.
그래, 자주 통화하자. 근데 영명아, 너는 목소리가 참 좋다. 그런 소리 자주 안 듣나? 잔잔하고 깊이 있는 게 참 듣기 좋아. 엄마한테 물려받았나 보다. 그치?
...그런가 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짧은 십 분 동안의 통화를 마치고 너는 녹차빛 다다미 위에 놓인 좌식의자에 앉았다. 전자담배를 입에 물고 깊이 빨아들인다. 히비스커스 향이 방 안으로 퍼진다. 첫째 이모는 너의 어머니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 단어를, 너의 어머니는 참 좋아하셨다. 동생들이 자신을 '언니'라고 잘 불러주지 않는다면서.
염을 끝내고 오동나무 관 속에서, 장미 백합 소국 금잔화 찬란한 수십 종류의 예쁜 향기들 가득한 꽃들 사이로 너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화스런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첫째 이모를 너는 기억한다. 언니.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언니...
식장 안에서도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지 않았던, 그 누구보다 섧게 흐느꼈던 둘째 이모를 너는 기억한다. 이 바보야. 왜 그렇게 불쌍하게 살다 가냐. 왜 그렇게... 불쌍하게 살다 가냐...
작년 어느 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나서 의절을 다짐했던 둘째이모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언니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었다. 너의 어머니는 일 년 넘도록 답장 오지 않을 메시지만 보냈다. 너는 그것을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세상만사 우리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겠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 속 품 사이로, 인간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풀들 사이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조용히 숨어있을 테지. 하며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볼을 적셨다. 참을 수도 없었고, 참지 않아도 괜찮았다. 검은 액자리본과 함께인 사진이 놓인 장소에서는 그래도 괜찮다. 그 누구보다 애달프게 눈물을 흘려도 괜찮고, 그 누구보다 무겁게 우울한 마음을 가져도 괜찮다. 그저 상처 가득한 너의 마음을 달래듯 어루만져주고 싶을 뿐이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허공을 바라본다. 정신을 차리고 냉장고 두 번재 칸에서 차가운 반숙란 두 개를 꺼낸다. 익숙한 듯 싱크대 모서리에 내리쳐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냉장고 안에 오래 두었던 탓인지 흰자의 겉부분이 껍질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자그만 계란껍질 조각들이 군데군데 흰자에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별 수 있나. 죽기야 하겠어.
너는 그대로 반숙란을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까득까득 계란 껍질들이 치아에 부딪힌다. 너는 먹는 음식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남들처럼 몸에 좋은 음식을 찾으려고도, 비싸고 맛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욕락에 물들지 말거라. 너의 어머니가 해주었던 그 말을 떠올린다. 무심하게 또 무욕으로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렇게 내일도 대충 먹은 뒤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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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대왕님. 인사드리옵니다. 상산 김씨 김 혜선의 둘째 아들 최 영명입니다. 저희 어머니를 애민히 여기시어 부디 검수지옥만은 피해 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을 끌어안으시고 그저 아픔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셨던 저희 어머니를 공덕을 높이 봐주시어 칼끝이 어머니께 향하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간청드리옵니다. 태양처럼 한없이 따뜻하셨던 저희 어머니를 애정과 사랑으로 보살펴주시고 떠날 때 작은 고통 하나 없이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기도드립니다. 나무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십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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