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왕님이시여. 인사드리옵니다. 상산 김씨 김 혜선의 둘째아들 최 영명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초강대왕님께 불리어 화탕지옥 앞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이 하나 있사오니, 부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어 어머니께 아무런 벌도 내리지 말아주시옵소서. 64년 일평생을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불도를 닦아오신 사람입니다. 혹여 어머니께서 지은 죄가 있다면 제가 받겠습니다. 제가 괴롭지 않겠냐구요. 괜찮습니다. 제가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불지옥에 떨어져 영겁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견디고 버티겠습니다. 부탁드리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밖으로 두껍게 껴입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찰나의 시간에 그 사람들은 네 세상에서 사라진다. 잠시 보였던 그들은, 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된다. 깊은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내려 읽던 책을 다시 읽는다. 서너 장 넘기다 스르륵 눈이 감겨 옅은 잠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글자를 읽다가 참기 힘들었는지 결국 책을 덮고 흔들거리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버스 앞계단을 내리고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스님, 저 영명이에요. 네. 지금 어디에 계세요? 네? 잘 안들려서요. 효천..취.... 네. 네 그쪽으로 갈게요.
효천라는 글자가 들어간 모든 것들을 검색한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스님의 말을 가끔 알아듣지 못했던 너는 그럴 때마다 알아듣는 척을 하고 스님의 말이 끝나면 전체의 문맥으로 놓친 단어를 유추하곤 했다. 효천유치원. 스님은 효천유치원이라고 말했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한다. 걸음이 빠른 너는 십칠 분의 거리를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은 높고 길은 꽁꽁 얼어붙어 미끄럽다. 전날 네 시간밖에 못 잔 탓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 앞을 걸어간다.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들의 체형을 유심히 관찰한다.
저 사람은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저 무거워보이는 사람을 내가 휘잡아 던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체급을 보고 내가 무조건 질 것이라고 할 테지.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것일테지. 저기 보이는 나보다 작은 사람을 나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저 사람이 품에서 칼이라도 꺼낸다면 내가 죽고 말겠지.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나는 아무 탓도 하지 않으리. 경쟁에서 밀려 죽게 되었음을 그저 받아들이리. 그것이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이 생로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날것의 생각들이 눈으로 들어와 코와 기도를 지나고 한숨으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나간다.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간다. 대설절을 며칠 앞둔 날이지만 여전히 가로수길 아름드리 느티나무 잎은 연한 녹차빛이다. 며칠 전 폭설이 내렸고 나무 아래 빛이 들지 않는 음지는 단단한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그 맑고 투명한 얼음들 속에 온 몸이 파묻힌 붉은 단풍잎들이 떠오른다. 아버지 때문에, 불편한 다리 때문에 한 곳에서 박힌 듯 살아왔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도 그렇게 살아오셨다. 아무도 신경써서 바라보지 않는 길바닥의 수많은 낙엽들처럼. 밟히고 찢기고 걷어차여 셀 수도 없이 크고 작은 생채기들을 품고 있는 낙엽들처럼. 겨울이 오면 눈들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리는 그 낙엽들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떠나셨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지를 주워 견공들 사료값을 버시던 스님은 오늘도 여전히 리어카를 끄신다. 내린 눈에 적셔진 박스들을 겹겹이 포개 리어카 위로 차곡차곡 쌓으신다. 준이, 아지, 이월이. 리어카를 따라다니는 강아지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생명이 없는 박스들로만 채워진 리어카를 보고 채색되지 않은 동백꽃을 보는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스님.
어, 왔어?
청명이는 오늘 못 온대요. 할 일이 많다네요. 근데 점심은 드셨어요?
아까 먹었지. 너이 배고프면 지금 저 들어가서 뭐라도 묵으라. 돈 좀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저도 아까 오전에 간단하게 배 좀 채우고 나왔어요.
그래. 그럼 오늘 말고 청명이 오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고. 니가 사든 청이가 사든 해서.
네. 그래야지요. 스님 잠깐 뒤에 다시 와도 될까요?
어디 갈라고? 나 바빠서 이따 오면 없을낀데. 그래 함 갔다 와 봐. 나 안보이면 전화허고.
네. 금방 돌아올게요.
너는 스님께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횡단보도를 빠져나왔다. 잰걸음으로 가까운 S은행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의 훈기가 차갑게 얼어버린 너의 볼을 감싼다. 오만 원을 인출해 흰 종이봉투를 안에 담았다. 건물에서 달리듯 나와 다시 스님이 계신 효천유치원으로 향한다. 스님은 여전히 쌓인 눈 옆 물기를 머금은 박스를 정리하고 계셨다.
스님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여.
큰 돈은 아니고 오만 원이에요. 추우신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따뜻한 밥 드시구요.
아이고 그래. 뭘 이런 걸 또 주나. 그래 고맙다 잘 쓸게.
아니에요. 도와드려야지요. 박스 좀 도와드리다 갈게요.
아이여 됐다. 이거 내 운동삼아 하는 거여. 이거라도 안 하면 몸이 더 망가지지. 됐고 너도 얼른 일 보러 가라.
네. 오늘은 금방 돌아가볼게요. 다음 주에 청이랑 같이 식사 한 번 해요.
그래. 잘 가라.
빨간 목장갑을 끼신 스님의 손이 흔들거렸다. 너는 스님이 손을 흔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생각보다 이렇게 정이 많으신 분이었나. 곁에 아무도 없어 많이 외로우시겠거니- 횡단보도 앞에 서서 잠시 스님을 바라보았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어 빠른걸음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자영업자들, 산책을 나온 노인들 사이로 나아간다. 사회는 여전히 바쁘구나. 언제쯤 이 사회를 벗어나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오기는 할까. 언제나 사회의 모서리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잔잔한 인디곡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또 사회에서 벗어난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하자면 정말로 사회에서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흘러들어오는 음악 또한 사회의 일부이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돌연변이인 거구나. 그런 돌연변이는 사라져야 마땅할테지. 그렇지만 돌연변이들이 또 모여 사회를 이루면 그 사회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까.
캄캄한 우주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잘라낸다. 어느새 너의 발길은 소시적 네가 살았던 동네로 향하고 있었다.
*
석면이 함유된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맑고 투명한 고드름이 자란다. 사이사이 갈라진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부름에 답하듯 너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로 보이는 구축 아파트와 가깝게 놓여진 옛날 가옥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깊숙한 곳까지 비워낼 듯한 숨을 내뱉고는 다시 길을 걸어간다. 이십 년 전, 날아갈 듯한 비바람에 제대로 걷기 힘들었던 그 개집 거리를 걸어간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너의 기억 속에는 개집이 있었다. 집에서 오 분 정도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면 그 개집이 보였다. 허리가 굽으신 개집 할머니는 중학생이었던 우리보다 키가 작았다. 너와 형제들은 백사마을에서 유일하게 그 할머니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집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아버지가 우리를 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개집 할머니는 양잿물로 비누를 만들어 파셨다. 삽십 분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등교했던 어린 초등학생 셋은 오고가며 그 개에게 빵조각을 주고 예뻐해주었다.
예쁘다. 아이구 잘 먹네. 나는 영명이야. 이건 빵이야. 맛있지.
정이 들 때쯤에는 항상 개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하얗고 작았던 서너 마리의 강아지, 두 번째는 유난히 겁이 많았던 작고 노란 진돗개. 마지막 강아지는 깊은 눈동자를 가진 검누른 암컷 아이.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조차도 혀 끝이 삐죽 나와 그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던 아이. 목을 묶은 줄이 단단해 두 걸음만큼의 공간밖에 움직일 수 없었던 개들은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을 끌어 촤르르 소리를 내었다. 개장수에게 개를 파는 건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건지, 아니면 직접 잡아먹는 건지 어린 너희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런 단순한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개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아이들을 돌봐줄 할머니도 그 집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르막길을 더 올라가자 나무판자와 슬레이트로 어설프게 지붕 구실을 하는 주택들이 보인다. 그 위로는 빨간색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다.
철거예정
붕괴위험
명절 때마다 어린 아이들로 북적이던 동네였다. 따뜻한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기와집들은 이제 차갑게 식었다. 전기와 가스도 끊어진 지 오래다. 벽을 손으로 문지르자면 벽이 닳아 흰 가루가 되어버린다. 너는 하얗게 분칠한 듯한 손가락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작아져버린 쌈지마당을 서너 바퀴 돌았다. 두 손으로 여기를 짚고... 오른 발을 이 틈바구니에 올리고... 읏차. 이젠 힘겹게 오르지 않아도 돌담 너머가 보인다. 이 위를 오르려고 참 애썼는데. 친구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이 위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녔었는데. 그때 함께 웃으며 놀았던 친구들을 기억해내려 애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다같이 어울려 산 속을 뛰어다니고 계곡을 휘젓고 다녔다. 까치와 가마귀가 울어댄다. 싸우기라도 하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듯이 숯껌정이 새들의 울음소리는 멈출 줄 모른다.
*
강한별. 세월 속에 묻혀있던 이름을 기억해냈다. 엣된 모습의 젊은 여자를 엄마로 둔 다섯 살짜리 남자 아이였다. 유독 청이랑 친했던 그 아이는 볕이 좋을 때마다 집 앞에서 엄마와 일광욕을 즐기곤 했다. 집밖에서 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나와 동생은 문밖으로 달려나가 한별이와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곧 어머니도 젖은 빨래감들을 허리에 이고 나와 한별이의 어머니와 묵혀두었던 일상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점심을 먹으러 돌아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함께 사슴벌레 육아를 공유하고 젤리가 부족하면 서로 빌려주었던, 몇 년만을 살다 마을을 떠나버린 바로 아랫집 젊은 부부. 똑같이 생긴 딸들과 젊은 사위들를 두었던 맨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 엄한 아버지를 두어 너희들이 고생이 많구나. 좁은 골목 오고가며 오만 원 짜리를 몰래 손에 쥐어주시던 그 갈색머리 이웃집 할머니를 떠올린다. 걷기도 힘들어하는 지체장애 아들과 단 둘이 살았던, 매년 더운 여름에 집 앞 큰 화분에 붉은 장미를 재주있게 꽃피우셨던 맞은편 아랫집 할머니를 떠올린다. 이따금씩 세찬 비가 내려 홍수가 나면 물이 범람해 집 문 앞까지 흙탕물이 차올랐던 작은 계곡으로 발길을 돌린다. 너는 그 작은 계곡 이따금씩 두려웠다.
아빠 말 안들으면 너희 셋 다 죽이고 아빠도 형무소로 간다! 그렇게 하고 싶냐. 그렇게 하고 싶냐!
집 뒤편에 세워져 있던 누렇게 녹슨 삽을 기억해낸다.
까마귀가 끊임없이 우는 밤이었어. 피로 물든 셔츠 위로 새카만 자켓과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어린 몸 세 개를 들쳐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 어둡지만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어.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묵묵히 흔들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덤불숲으로 실려갔어. 남자는 녹슨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어. 텅 텅 가끔씩 삽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어. 규칙적인 소리에 더 빠르게 정신이 흐려졌어. 어린 초등학생 세 명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구덩이가 커졌을 때 남자는 너의 몸뚱아리를 발로 밀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어. 그는 너의 배 위에 형과 동생의 몸을 열 십자로 올리고 다시 삽질을 시작했어. 흙이 조금씩 몸 위로 떨어졌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너는 손끝에 힘을 줘봤지만 움직일 수 없었어. 느리게 체온이 떨어졌어. 형과 동생이 아직 살아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형도 나와 같을까. 힘껏 소리내어 동생들을 부르고 싶을까. 두렵지만, 그렇지만 맏이라서 또 강한 척 하는 건가. 우리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청명아. 미안해. 이 못난 둘째형이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신을 잃을 듯 어지럽다가 다시 괜찮아졌어. 형과 동생의 체온이 빠르게 식어갔고 곁에 있는 나의 체온까지 가져가기 시작했어. 천천히 피부에 차가운 흙이 덮여왔어. 흙이 입을 덮고 눈을 가렸어. 흙이 콧속으로 들어와 연한 살들을 간지럽혔지만 찢어진 폐 때문에 재채기가 나지 않았어. 하늘에서 너의 몸이 보이지 않을 때쯤 너는 강한 흙의 압박감을 느꼈어. 남자가 발로 흙을 꾹꾹 누르고 있었어. 호흡이 느려지고 까마귀 울음소리는 점점 일그러졌어. 그렇게 죽어가던 순간...
눈을 떴다. 언제 한 번 커다란 태풍이 찾아와 계곡과 마을 골목을 잇던 다리가 무너져 지금까지 어설프게 이어진 채로 있는 그 작은 계곡을 바라본다. 입동 무렵 계곡물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개구리알로 가득했던 그 작은 계곡을 바라본다. 장난으로 개구리를 잡아 죽였던 어린 시절의 너를, 너는 속으로 나무라면서 예전에 살았던 집으로 향한다.
*
옛날에 살았던 집은 좁았다. 저 좁은 곳에서 어떻게 다섯 사람이 살았을까. 너는 집 주변을 빙 둘러보다 작은 방 창문 앞에 멈춰 섰다. 행여나 아들들이 도망이라도 갈까 바깥에서 단단한 나무판자로 막아둔 창문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도 잠겨 있었다. 아직도 이웃들에게 숨길 것이 남아있나, 아버지. 생각하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
너는 아버지 눈을 피해 어머니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형과 동생들과 연구했었다. 이쪽 산을 타고 저쪽 골목으로 가고...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마른 나뭇가지에 참새들이 앉아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황급히 날아오른다.
너희들도 고향 찾아 조상 찾아 왔느냐. 참새들아. 까치 까마귀들아.
골목길 끝에 중형 스쿠터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주변으로 호기심 많은 흑백 얼룩고양이가 서성거린다.
그건 스쿠터라고 하는 거야, 얘야. 영어라서 모르려나.
묘법연화사로 가는 커다란 열여섯 계단을 오른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이라도 오르막길을 올라온 뒤 저 열여섯 계단까지 오르고 나면 숨이 찼고 두꺼운 점퍼 안의 몸이 뜨거워졌다. 계단 꼭대기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멀리서부터 드러난 묘연사는 속이 텅 비워진 깡통의 모습이었다. 발목만큼 내린 눈은 녹지 않아 지저분한 뒷마당의 잔해들을 덮어주고 있었다.
모든 짐을 뺀 묘연사는 흑백 텔레비전처럼 아무런 색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카만 연탄 수백 장이 산을 이루던 뒷마당도 쌓인 눈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떨어져있을까 하고 너는 어머니가 주무셨던 방을 가장 먼저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너가 기타치던 방에도 어머니가 항상 쌓아두기만 했던 창고에도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어머니의 목소리, 화난 듯 정이 많았던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던 곳은 까치 까마귀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집의 모습과 다른 낯선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집을 나가려던 찰나 법당 안의 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 계단을 올라 박스 가까이로 갔다. 희끗한 재가 묻어있던 박스 속에는 양초가 가득 들어있었다. 어느새 너는 '소원성취' 글자가 적힌 양초를 여덟 개 집어 가방 안에 넣고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지 않도록 박스를 여맨다.
어머니의 배웅 없이 너는 커다란 열여섯 계단을 다시 내려간다. 겨울바람에 식어버린 집터와 멀어져간다. 차가운 왼쪽 뺨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 불지 않아 포근했던 날 하늘은 짙푸르고 길었다. 이내 오른쪽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머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힘겨운 숨을 몰아쉰다. 고개를 숙여 소리없이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너가 스마트폰을 처음 만지던 유소시 어느 겨울날이었다. 쌈지마당 골목길 앞을 걷다 멈춰 기러기 떼를 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길고 푸르렀다. 맑구나. 특별하게 어울리는 단어를 찾지 못했던 너는 휴대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찬찬히 훑어본다. 가장 최근에 전화를 걸었던 사람을 '맑음'으로 저장해두었다.
너는 걷는다. 이파리를 전부 떨어뜨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아카시아 나무 곁을 걷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데로도 도망가지 않고, 언젠가 하얗게 꽃피울 아까시 나무 옆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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