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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2024-11-25

by EugeneChoi 2024. 11. 26.

장례

김태현 선생님이 이틀이나 찾아와주셨다.
우민이도 삼일이나 같이 있어주었다.

회사 동료들도 많이 찾아오고, 친구들도 와주었다.

찬호, 준성이와 동영이가 찾아왔다.
찬호는 화환까지 보내주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만나지 않았던 진보도 찾아왔다.

어머니를 한결같이 찾아오던 김희경 바이올린 선생님은 어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오열하셨다.

왜 그렇게 살다 가냐. 왜 그렇게 불쌍하게 살다 가냐...
왜 그렇게 외롭가 살다 가냐...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째 미숙이모도 서럽게 우셨다.

 

 

제사상을 차려야 한단다.
3일장 중 이틀째에 제사상을 차려야 한단다.

아.
항상 조상님 제사를 지내시던 어머니.
이젠 우리가 당신의 제사를 지냅니다.
이곳 어디선가에서 어른어른 계신가요
아픈 다리 사라져 훨훨 날고 계신가요

아직 근육과 피부가 뼈에 붙어있어
멀리까진 못 날아가시나요.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의 제사를 지내면서
그저 조상이라는 단어를 아득히 멀게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오늘은 아주 많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태어날 누군가의 조상이 되실 나의 어머니.
그 단어를 다시 아주 멀게 느낄 그 누군가들의 조상, 나의 어머니.

 

가족

어른들이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어른들이 생겼다.
엄마는 1남 4녀 중 장녀셨다.
둘째는 외삼촌이었고 나머지는 여동생들이셨다.

아무것도 없던 우리 삼형제에게 가족이 생겼다.
어른들이 생겼다.
사촌동생들이 생겼다.

05년생의 첫째 이모 아들 성현이.
03, 06, 09년생의 셋째 이모 딸 시현이, 시은이, 그리고 아들 서율이.

동생들이 생겼다.
그 사촌여동생들이 그랬단다, 오빠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오빠들이 생겼다.

 

화장

혜진선배가 남편분과 와주었다.
찬호와 우민이, 준성이도 와주었다.
운구할 사람이 없었기에 부탁을 드렸다.
감사하다는 말로 충분하지 않았다.

서울추모공원에서 어머니의 순서를 기다렸다.
혜진선배에게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드린 뒤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울음이 나왔다. 멈출 수 없었다.

셋째 은희이모가 멀리서 나를 보시고는 다가오셨다.

유진아. 엄마가 좋은 기억도 많으셨을 거야.
셋이 이렇게 올바르게 잘 커주었잖니.

이모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너무 불쌍하게 살다 죽었어요.
아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더 오래 건강하게 오래 사셨을 텐데...

너무 서럽게 울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따뜻했어요.
어머니가 너무 따뜻해서... 매년 겨울이 오는 줄도 몰랐어요...

유진아. 그 겨울, 다같이 따뜻하게 이겨내자. 그럴 수 있어.

이모들은 다 따뜻했다.
목소리도 조곤조곤하고 차분했다.
어머니가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던 어머니의 가훈처럼, 부드럽지만 강했다.

은희이모는 어머니를 너무 닮았다.
이모들의 손은 어머니의 손과 너무 닮았다.
이모들의 손은 어머니처럼 따뜻했다.

 

안치

화장한 어머니의 뼈를 보았다.
불에 타지 않은 보철물도 나왔다.
저건 분명 발목에 있었을 것이리라.
발목이 부러졌을 때 발목뼈를 이어 붙이려고 사용된 보철이었으리라.

분쇄를 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의 뼈의 반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져있었다.
뼈가 약해서인건지, 아니면 화장하면 뼈의 일부는 저렇게 바스라져버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너스톤에 어머니의 유골을 안치했다.
700만 원이었다.
매장을 하고 싶었지만, 20년 가까운 시간을 한 곳에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불편하진 않을까 싶어서.
한 곳에 갇혀버린다면, 또 답답해하실 것 같아서.

 

스님

스님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모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자그마치 18년..이구나.
엄마가 아빠랑 살던 집을 나가 스님이랑 살기 시작해 18년이 지났구나.
아빠랑 살던 시간보다, 스님이랑 함께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구나.
삼형제와 한집에서 살던 시간보다, 스님이랑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었구나.

스님의 입장도 생각해줘야 해.

동생이 말했다. 스님도 자다가 일어나 어머니를 깨우려고 왼팔을 더듬으면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그저 스님을 스님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가까운 스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님에게 어머니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정말 가족같은 관계였을까. 그래. 그랬을 것이다.

가끔씩은 스님을 찾아가야겠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는 스님에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스님과 같이 식사를 해야겠다.
가끔씩은 전화를 드려야겠다.

 

한가지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염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례지도사의 조언에 따라 염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다.
가족들이 그걸 불편해할 리가 없다.
그리고 담당자들이 염을 제대로 하는지 아닌지 확인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
장례식이 무척 바빠서였는지,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 

엄마의 몸은 마지막에 정갈하게 잘 닦였을까.
담당자들이 염을 할 때 함부로 대하진 않았을까.
몸에 상처난 부분을 막 다루진 않았을까.

그저 후회만, 끝없이 후회만 하는 중이다.

엄마는 예뻤다.
마지막에 아름다우셨다. 관 속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 향기들이 마치 어머니로부터 나는 것 같았다.

촉촉한 어머니 피부를 보자,
왜 지금껏 어머니에게 화장품 하나 사드리지 않았을까-
왜 그런 생각들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걸까-
또 후회를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어머니는 아프지 않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삽관된 호흡기, 투석장치는 이제 없다.
이제 어머니는 괜찮다.

이제서야 어머니는 삼형제 곁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급하게 또 어디론가 가신다.
우리들이 만날 수 없는 어딘가로, 밝은 태양빛 너머 어딘가로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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