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11월 중순, 입동이 지난날에도 한낮의 기온이 20도까지 올랐다는 것을.
지난주에 초록 옷을 입고 있었던 은행나무들은, 전부 노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차가운 늦가을바람이 일자 나무에서는 흙먼지를 털어내듯, 붙잡고 있던 낙엽들을 놓아준다.
너는 길게 뻗은 가로수길을 걷다 말고 은행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살랑살랑 부는, 그렇게 시리지는 않은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천천히 올린다.
일 년 간 영국 브라이튼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나는, 새삼 한국은 바람이 세차게 불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떨어지는 태양빛 은행나무 잎을 흘겨 뜬 눈으로 응시한다.
손끝으로 툭 건들면 바스라져 버릴 듯, 길바닥에 떨어진 연약한 플라타너스 잎에게도 눈길을 준다.
우리 엄마의 삶은 초록색 잎이었을까, 노란색 잎이었을까.
더 오래, 더 힘차게 매달릴 수 있지만 바람에 의해 나가떨어져버린, 연둣빛이었을까.
더 이상 붙잡을 힘이 없어 온몸이 익숙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황금빛이었을까.
혹은, 애벌레에게 사정없이 뜯어먹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무엇이었을까.
어쨌거나, 잎은 진다. 떨어진 낙엽들 위로 사람들이 무심하게 짓밟고 지나간다.
그렇게 아스라이 가루가 되어, 더 이상 낙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겠지. 잠시 생각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하늘을 헤엄쳤다.
*
백화점 창 앞에서 너는 걸음을 멈춘다. 자신의 모습만 어둑하게 비치는 유리를 바라본다.
삐뚤어진 가방을 너는 고쳐 맨다.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귓구멍에서 빼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담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린 뒤 중환자실로 가는 짧은 익숙한 복도를 너는 걷는다.
아세톤 냄새가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는 그 병원 복도를.
슬픔으로 가득 채워진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가득한 그 복도를.
*
어머니의 오른 발의 가락들도 거뭇거뭇 색이 진해졌다.
꼭 마치 누군가 검은 먹물로 붓칠을 한 것 같았다.
마사지를 할까 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손은 어느새 어머니의 오른발을 정성스럽게 주무르고 있었다.
손가락 끄트머리만, 한때 열정적으로 타다 멈춘 연탄처럼 까만색이었지만
마치 연탄이 불타기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가기라도 한 걸까, 어머니의 중지손가락이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손바닥은 말랑했지만 나무껍질처럼 차가웠다. 검게 타버린 손가락은 말린 생선처럼 딱딱했다.
절단술이 들어갈 것이라고, 동생에게 얼핏 들은 것 같다.
퉁퉁 부어버린, 새까맣게 죽어버린 손을, 앞으로는 손깍지를 껴볼 수 없으리라고 너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너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을 때, 종종 너의 얼굴을,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그 손의 감촉을 너는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 손은 겨울의 햇살처럼 따뜻했다. 그 온기가 너무나도 따뜻했어서 얼어버린 마음이 언제쯤 녹아내릴까,
이십 육 년째 새하얀 눈이 내리는 그곳에는 언제쯤 따스한 봄이 찾아올까. 너는 생각했다.
*
10월의 병원비는 660만 원이 나왔다.
11월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500만 원이 청구되었다.
어느새 미수금액은 이천칠백만 원으로 늘어나있었다.
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영수증을 천천히 읽어내린다.
삼천에 가까운 그 금액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니, 정말 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돈에 싫증이 나버린 너에게 그 금액은 그저 여덟 자리의 숫자일 뿐이었다.
평생 빚만 갚다가 사는 삶도 나쁘진 않으려나.
슬픔이 슬픈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닐 테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내 삶도 슬픈 방향만을 찾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마지막 숨이 쉬어질 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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