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향 '의성'을 다녀왔다.
새벽 2시 40분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어 3시 40분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동생과 스님을 깨우고 미리 대여한 렌트카 K5로 향했다.
스님은 참외, 바나나, 천혜향을 가득 챙겼다.
스님은 어머니와 18년 가까이 지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나고부터 쭉 스님과 함께 산 것이다.
그전부터 알고 지낸 시간을 더하면 20년이 훌쩍 넘을 것이다.
#의성
"저쪽이 너희 어머니가 다녔던 초등학교여."
스님은 의성 곳곳을 설명해 주었다.
어머니가 다니셨던 초등학교, 다니던 길, 장날에 열리는 시장까지.
군위군을 간 이유는 하나였다. 어머니의 묘.
"너무 좋다. 죽어서 여기로 오고 싶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스님은 말했다.
그래서 석천스님의 조상님들인 '한 씨' 집안의 묘로 향한 것이다.
그곳이 군위군이다.
그것을 모른 채로 우리는 어머니를 납골당에 안치했다.
"너희들도 항아리 안에 들어앉아 봐라. 답답하제?
다리도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거 항아리에 담아둬서 뭐 하게.
너거 어머니가 항상 좋다고 했던 군위군으로 빨리 데려와.
여기다 뿌려주면 좋다고 훨훨 날아갈거여.
풍경 봐라. 탁 트이니 얼마나 좋으냐, 안 그래?"
선산은 풍경이 좋았다. 꽃나무도 자라고 상석도 깔끔했다.
#감주
우리는 선산으로 오르기 전 장을 봤다. 군위재래시장은 3일과 8일이 장날이다.
스님은 족발과 감주, 떡, 황태포를 사셨다.
"13000원예. 예? 소금예? 소금.. 예 두 개 넣어드릴게예."
족발은 13,000원에 양이 상당히 많았다.
"감주..감으로 만든 술..."
동생이 말했다.
형이 처음 감주를 마시고선 "이거 식혜 맛인데?" 라고 말했다.
"그게 아이고, 식혜를 경상도 말로 감주다 이 말이여."
스님의 말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감주. 감으로 만든 술.
그게 아니고 전통 음료 식혜.
#군위군
2023년 7월부터 '군위군'이 '경상북도'에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더니 어른들이 물었다.
"촬영하러 온거예요?"
"아, 아니에요. 취미로 사진 찍고 있어서요."
"어디에서 왔어요?"
"수원에서 왔어요. 어머니 고향이 의성이에요."
"아이고. 그렇구나. 그래서 왔구나. 여기 촬영 많이 해가예.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하하하."
군위는 서울과 너무나도 달랐다.
다른 세상으로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바쁘지도 않았고 큰 목소리로 떠들지도 않았다.
지겨운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정치권 정당들이 서로 비난하는 현수막도 보이지 않았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편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
모두가 어머니처럼 친절하고 따뜻하고 정겨웠다.
군위군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게 했다.
여기서 살고 싶었다.
군위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난 후, 우리는 한 국밥집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중년 남자 두 명이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돼지국밥을 먹고 있었다.
"여기 뭐가 맛있어요?"
"어른들은 내장국밥 먹고예, 젊은 아들은 순대국밥 많이 먹어예."
스님이 물었고 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답했다.
스님은 내장국밥, 형과 동생은 순대국밥, 나는 그 중간쯤인 돼지국밥을 주문했다.
서빙 로봇이 우리가 앉은 6번 테이블로 반찬을 배달했다.
서울의 국밥 식당과 차이가 많이 났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파김치의 양이 푸짐했다. 쌈장과 새우젓, 소금도 양이 상당했다.
식당 아주머니께서 국밥 네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건더기가 서울에서 먹는 국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가격도 저렴하게 9,000원이었다.
서울에서는 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건더기도 절반 정도였다.
TV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 파면에 대한 이야기와 이재명 대표의 움직임.
그것을 보자마자 식당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이재며이 그거 대통령 되면 안 되는데.
자가 대통령 되면 나라가 사회주의가 되어버려."
식당 아주머니가 거침없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스님이 말을 이었다.
"전라민국을 하나 새로 세워야 한다니까. 저기 전라도는 빨갱이 소굴이여.
이 나라에서 625를 겪었으면 절대 저거 지지 몬한다.
그래도 저거 지지하면 삐리한 놈이여."
우리 삼 형제는 어른들의 말씀에 한 마디씩 말을 덧붙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거 이재며이 목 칼에 찔렸다고 하더만. 그거 쪼마이 더 들어가지.
그거 찌른 놈도 못 쓴다. 이래 찌르나 저래 찌르나 깜빵 갈 거면 그거 직이고 깜빵 가지, 에휴.
다 쇼여 쇼."
우리는 웃었다. 이런 경상도가, 아니 대구가 좋았다.
#답사 후에 #할미꽃
형과 동생을 차례로 서울대입구역, 봉천역에 내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스님을 모시고 중계동 양지대림아파트로 향했다.
"산 좋지, 안 그래?"
"네, 산 좋아요."
"막내도 신나서 막 폴짝폴짝 뛰어다니드만."
"그러게요. 좋은가 봐요."
"너거 어머니가 좋아해서 그런 거여."
"네."
"나중에 납골당에서 항아리 꺼내서 차 타고 올 때 어머니에게 말해. 엄마 답답했지? 이제 좋아하는 산에 가자,라고"
"..."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과일과 포, 감주를 꺼내 집으로 옮겼다.
나는 스님과 방바닥에 마주앉아 군위시장에서 사온 족발을 먹었다.
"스님. 청명이가 고등학교 땐가 집 나갔을 때요."
"어."
"정욱이가 그때 묘연사에서 얼마나 살았어요?"
"가는 중학교 땐가 왔어. 중고등학교를 내가 보내줬지."
아니었다. 청명이는 고등학교 때 집을 나갔고, 약 2년 동안 묘연사에서 어머니와 스님과 함께 살았었다.
그리고 그 기간이 확실하지 않아 스님께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머릿속에는 그 기억이 약간 흐려진 듯했다.
"거 막내가 묘연사로 오고 나서 너를 쫓아냈지. 왜 쫓아냈는지 아나?
너거 아버지 때문이여. 자식 둘이 집을 나가버리면 애비가 정신이 헤까닥 안 돌겠나?
사방팔방으로 동네 구석구석 다 찾아댕기겠지. 그럴까 봐 너 쫓아낸 거여.
그러니깐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어."
"에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명이가 엄마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너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가가 고집도 세. 너네 어머니도 고집 세고.
좌우간, 너거 어머니가 칠십까지만 살았으면 딱 됐는데.
그래도 어쩌겠나. 누구나 한 번 오고 한 번 가는 게 인생인데.
너거들이 고생 많았다."
스님은 어설프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만큼이나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을 스님에게, 나는 위로를 받았다.
군위군에 자리한 스님의 조상님이 묻힌 선산을 생각했다.
그곳에는 꽃나무도, 잔디도, 소나무도 가득했지만 눈에 가장 들어온 건 '할미꽃'이었다.
"어, 할미꽃."
짧은 외마디 외침에 스님과 형제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뭐?"
"아니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 할미꽃을 찍었다.
카메라도 꺼내 할미꽃을 렌즈에 담았다.
어머니가 해주신 할미꽃 이야기를 떠올린다.
세 딸을 모두 시집보내고 외로움에 세월을 보내는 어머니가
추운 겨울날 셋째를 찾아가는 와중에 눈 속에서 쓰려져 세상을 떠난 이야기.
그리고 쓰러진 어머니를 본 셋째를 위로하기라도 하듯이,
어머니를 묻은 흙 위로 피어난 할미꽃 한 송이.
어머니는 외로웠다. 시집보낸 딸들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세 딸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처럼,
과거에 막내딸을 구박했던 그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듯 푹 고개 숙인 꽃.
그 꽃을 사람들은 '할미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픈 어머니 곁을 지킨 막내.
그러지 못한 나.
아- 내 이름 석자가 참 부끄러운 밤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밤이다.
어머니- 엄마- 목 놓아 불러 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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