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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읽혀진 책들

섬의 반란 - 현길언

by EugeneChoi 2025. 2. 4.
 
섬의 반란,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정체성총서」제7권『섬의 반란, 1948년 4월 3일』. 이 책의 저자 현길언은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는 정치 논리로 4.3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작성된 것이라 말하며 이 책을 통해 4.3의 실상을 밝혀내고자 한다. 저자는 객관적 시선으로 4.3을 직접조사하여 그 전개과정을 들려준다. 4.3사건의 본질은 반란군과 국군 양쪽에서 제주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당했다고 말하며 저자 자신이 직접 겪은 4.3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저자
현길언
출판
백년동안
출판일
2014.06.25

 

저자는 1940년 2월 17일 제주도에서 출생한 제주도민이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이념싸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저자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좌우로 나누고, 이념적 잣대를 들이밀어 평가하는 것이
작가의 삶과 제주4.3사건의 모든 희생자들을 폄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해방 전후로 제주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국전쟁 속 중요 사건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는 제주4.3사건에 대해
자신과 가족들의 경험, 주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한 사건을 바라볼 때, 그 사건의 부분만을 바라보면 깊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 사건의 앞뒤 배경과 그 배경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이하 보고서)가 조사된 배경과 누가 조사하였는지,
과연 그 배경에 정치적인 움직임은 없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조목조목 대어 [보고서]가 어떻게 왜곡되어 적혔음을 설명한다.

 

 

 

요약

배경

  제주도민들은 외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제주를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1937년 중일전쟁이 끝나고는 모슬포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해군항공대를 설치해 대륙침공의 전진기지로 이용하려 했다. 또, 세계 제2차대전 말기에는 많은 병력을 제주도 내에 주둔시켰다. 일본군들은 행패가 심했으며 심지어 제주도민들은 전쟁 상황 속에서 군사 기지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군 탓에 수차례 미군의 폭격을 받아 도민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도민들은 이런 생활에서 빨리 벗어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바로잡기

  제주4.3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으로 치부하기보다는, 4.3사건으로부터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좌우이념전쟁'의 안타까운 결과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보고서]에서는 4.3사건의 배경이 3.1절 행사 때 기마경찰이 어린 아이를 치고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사실 그것이 발단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남조선노로동당(이하 남로당) 이 반미,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삐라를 뿌리고 도민들을 선동하여 도민들의 90% 이상이 좌경화과 되어버린 것이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3.1절 기념행사 때 뿌려졌던 삐라에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배족도들을 물리치는 데 함께 하자", "미제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해..." 가 적혀있었던 것, 그리고 3.1절 기념행사 때 참여자들이 목청껏 외쳐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구호를 보아 알 수 있다. 이로써 이들의 3.1절 기념행사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히 3.1운동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 "조국통일과 완전독립"임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전투 발발

  시작은 남로당이 주 축이었던 인민 무장 유격대의 공격이었다. 1948년 4월 3일, 그들은 제주도 내 경찰관서 12곳을 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선거 관계자, 우익 인사들을 테러하였다. 이날 수십의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으며, 특히 인민 유격대는 우익 인사들을 매우 잔인하게 살해했다. 우익 인사의 집을 급습했음에도 당사자를 찾을 수 없을 때는 그의 노모나 부인,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살해하였다. 우익 인사들을 테러한 이유는, 자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10선거를 막기 위함이었다. "조국통일", "통일적 민주주의", "단선 단정 반대" 를 주장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었음을 그들이 직접 살포한 삐라들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좌경화된 도민들

  제주도의 공산당원은 1946년 말까지 100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남로당을 결성하고, 그들 중의 지식인들이 지역 사회에서 당원들을 입당시키면서 그 수가 무서울 정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원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협박하여 강제로 입당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미군정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민의 85%가 좌경화되었다'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계엄령

  유격대는 끊임없이 5.10 선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경찰관을 살해하고 선거관련 담당자들을 테러하고 사무실을 습격했다. 선거 당일에는 남로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투표행사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기까지 했다.그 결과로 북제주군 갑, 을 2개 선거구는 투표자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었다. [노획문서]에는 그 피해규모가 자세히 나와 있다. 1948년 4월 3일부터 그해 7월 말일까지 유격대의 전과, 경찰/민간인의 피해 정황이다. (저서 습격 31회, 건물 파괴 3동, 경찰관 살해 74명, 부상 35명... 관공서 습격 2회, 반동 살해 223명, 부상 28명, 반동 가족 살해 12명... 전선(전봇대) 절단 940개, 도로 파괴 170곳, 교량 파괴, 3곳, 기타 무기 노획...) 
  다른 곳은 전부 선거율이 높았지만 반복적으로 제주도에서만 선거 무효가 나오자,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 정부는 국가 보위의 차원에서 국군을 중심으로 경찰 병력의 도움을 받아 강경하게 진압하기로 한다. 이때 여순반란도 일어나게 된다.
  상황은 악화되었다. 진압작전을 담당했던 연대의 연대장이 부하에게 사살당하고, 출동 명령을 받은 부대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출동을 거부하고, 공산주의로 물든 몇 부대는 부대를 이끌고 월북하기도 하였다. 결국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에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중간산 부락을(유격대 주 활동구역) 토벌하기로 한다. 해안으로부터 5km 너머의 지역 및 산악 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모두 '폭도'로 간주하였다. 이 작전을 '초토작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작전에서 진압군의 반인권적 토벌 행위가 자행되었다. 이어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에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학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주4.3사건에서 알고 있는 학살은 정부군의 민간인 학살밖에 없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정부 진압군도 반인권적 학살행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세력인 인민유격대도 마찬가지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먼저, 북에서 내려온 극우세력 '서북청년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세력들을 혐오했으며 경찰, 진압군과 합세해 초토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민가를 수색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공산주의 세력들을 색출했으며 좌편향된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처형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또한 625가 발발하자 정부의 진압군은 포로로 잡은 인민유격대 인원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언제 반란을 다시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정부의 위기관리 차원이었다.
  인민유격대도 민가를 탈취하고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정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중간산 부락'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에는 민가도 많았다. 유격대는 식량과 생필품을 탈취했으며 이에 협조하지 않는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남원리에서 인민유격대에 의해 마을 주민 40여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는데, 이는 4.3기간 동안 해안마을이 유격대의 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시간이 흘러 유격대의 간부 이덕구, 정권수 등이 사살되고 1957년 4월 2일 김성규 등 두 명이 체포되거나 사살됨으로써 4.3사건은 결국 마무리되었다. 남로당이 1948년 4월 3일 반란을 일으킨 지 정확히 9년이 되는 날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글에서 4.3사건을 길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권의 역사 학술지를 종합적으로 읽고 내 스스로 교차검증을 통해 제주4.3사건을 정리,요약할 것이다. 단지 이렇게 글을 적는 이유는 이 책의 저자 '현길언' 작가가 현장 속에서 보고 느낀 사실들을 단 몇 사람이라도 올바르게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린 작가의 친인척에는 공산당원도 있었다. 공산당원이었던 삼촌들은 경찰들에게 체포당해 주민들에게 잔인하게 돌팔매질로 죽어갔다. 작가의 할머니는 유격대에 의해 아랫도리가 창에 찔렸고 그 유격대들은 또 주민들에게 잔인하게 집단린치를 당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작가의 할아버지는 유격대였던 삼촌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눈물을 참아가며 그들에게 흙을 부어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념적 대립으로 인한 참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어떤 표현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가족 친척 안에서도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를 욕하고 죽이는 이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어린 세대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잃어보지도 않은 자유를 어떻게 지키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그 반인권적인 학살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모여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한다. 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면 누가 산사람(유격대)이고 누가 토벌대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삶의 기로에 놓여 있던 그들의 이야기를 서로 진지하게 마음 깊이 들어주었다. 

  "재밌어서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였던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책 내용 중-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남긴다.

"나는 내게 퍼부었던 야유와 비난의 글들을 읽다가 그만 두면서, "당신들이 4.3을 아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왜 4.3은 날이 갈수록 그 사건과 관계가 덜한 사람들에 의해 분노와 대립과 갈등으로 치닺게 되는가? 나같이 4.3을 폄훼한다는 사람들 때문인가? 누가 진정으로 4.3을 폄훼하는가? 그것은 죽은 이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진실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시국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진실을 공유할 수 있었다."

"경찰에 한평생 몸담고 살았던 셋삼촌은 두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소리없이 울었다. 어느 날 꿈에 두 동생이 집 올레 정낭 밖에 서 있는데, 셋삼촌이 '왜 거기 서 있느냐, 어서 올레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두 동생은 물끄러미 형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더라고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한 꿈을 꾸기까지 두 동생의 죽음에 집착해 있었던 셋삼촌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4.3사건에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는 일인지, 생각할수록, 글을 쓸수록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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