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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뵈러 하계 을지병원을 들렀다. 면회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사시는 양지대림아파트로 향했다. 방에는 필요한 것만 최대한 골라서 두었다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검정 비닐덩어리들로 방이 비좁아져 있었다. 방 한쪽 모서리에는 동생이 정리해둔 삼 형제의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은반지와 일본에서 사 온 오르골, 수년 전 어머니가 내게 써준 손 편지. 네 권의, 내 자필로 꽉꽉 채워진 노트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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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한 신병훈련소로 입소했을 때 다짐을 하나 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루 한 페이지씩 일기를 쓰기로. 군생활의 모든 기록을 남겨 머리가 희끗해져 펼쳐봤을 때 내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돌아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놀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종종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다른 이들에게 손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어리고도 어렸다. 스무 살의 나이는 참으로 어린 나이다. 그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일주일이 넘는 긴 훈련을 나갈 때는 일기노트에 일기를 쓰지 못했다. 단지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을, 흔한 0.5mm 삼색볼펜 귀를 스프링에 꽂아 둔 그 작은 수첩을 건빵주머니에 꺼내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적었다. 그리고 훈련을 마쳤을 때 그 수첩에서 글자가 적힌 부분을 올곧게 찢어내 일기장에 풀로 붙였다. 병영도서관에 공용 풀이 있어 항상 그 풀을 이용했었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서 손바닥만 한 작고 얇은 종이에 풀을 진득하게 문질러 일기노트에 붙였을 때, 점점 샌드위치처럼 부풀어가는 일기장을 보면서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대단하진 않지만,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업적을 쌓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두꺼운 몇 권의 노트를 만들면 꼭 누군가가 나에게 큰 상이라도 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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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 없는 블로그가, 또 다시 누군가의 이야기로 채워져 나갈 것이다. 강원도 화천, 이층 건물이라고는 초병 둘이 근무를 서는 초소밖에 없는 열악한 부대에서 살아온 600여 일간의 나날이 고스란히 그 네 권의 노트에 적혀있다. 하루에 두 이야기씩 적으면 1년 안에 끝나겠다. 결과는 언제나 계획을 따라주지 않지만, 그래도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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