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0월 1일에 평택으로 이사를 간다.
평택을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평택에 거주하는 임직원들에게 전세대출 이자 지원을 해주는 사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평택 아닌 곳에서 월세, 혹은 전세를 낸다면
월세는 보통 30~50만 원을, 전세 이자는 25만~30만 원을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자 지원 제도를 활용한다면 월 지출(관리비 포함)이 20만 원 정도로 줄게 된다.
연 400~600을 거주비로 내다가 연 250 정도를 낸다면 1년에 약 300만 원에 가까운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
그 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에, 아끼려고 해 본다.
직주근접이 회사에 지각하는 것보다 싫은 나의 선택이다.
아, 그리고 이사 가는 것이 좀 설레기도 하다.
몇몇은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삶이 편안하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아직은 편안하지 않다.
자꾸 이동하고 싶고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다만 도망가고 싶은 걸까.
#가족관계증명서
대출 이자 지원 신청을 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를 출력해야 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던 도중, 정부24에 들어가서 가족관계증명서 발급 신청을 눌렀다.
그리고 나는 곧 출력될 가족관계증명서 인쇄 미리 보기 창을 보고 잠시 몸이 굳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눈물이 새어나왔지만, 도로 눈으로 삼켰다.
울었지만 울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엄마 이름 옆에 적힌 [사망]이라는 글자가 칼날이 되어 내 마음을 마구 후볐다.
이제야 실감이 난 걸까.
아니, 이미 충분히 실감했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아픈 걸까.
엄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아픈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가끔은 그렇게도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슬퍼하는 그를 보고
시간이 좀 지나 밝게 웃고 다니는 그이들을 보자면
'슬픔이 금방 지나쳐버린 걸까. 저들은 정말 괜찮은 걸까-'
'저들은 금방 괜찮아지는데, 나만 이렇게 오래도록 아픈 걸까-'
물론 아니겠지. 다 슬프겠지. 부모 잃은 자식의 마음이 쉽게 괜찮아질 리가 없겠지.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도...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된다.
쉽게 나아지지 않을 사람이 되어버린다.
따뜻해지지 않을 아픈 마음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오늘은 비가 내렸다. 지금도 내리고 있다.
구름이 깊게 서린 탓에 이른 저녁부터 날이 어두워졌다.
슬픈 어둠이 우리 동네를 삼켰다.
나를 위하기라도 하듯이.
더 오래 어둠 속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도록 도와주기라도 하듯이.
더 울으라고, 맘껏 울으라고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정말 너무 보고 싶다.
#이모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모 목소리를 들어보니 내게는 쉽게 말하지 못할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나는 말해도 괜찮다고,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모는 끝내 거절했다.
나는 말했다.
얼마 전에 어떤 영상을 보는데 어떤 아이가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가장 용기 있던 말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이가 '도와줘'라는 말을 했다고.
도와달라는 말은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끝까지 해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이모는 내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해줬는지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나는 내가 주제넘게 말하진 않았냐고 물었지만, 이모는 아니라고 했다.
이모의 목소리에는 맑은 눈물이 가득했다.
더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나는 이모의 마음이 얼른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모는 고맙다고 말했다.
아-
엄마가 글로 많이 썼던 혈육의 정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오랜 시간을 같이 하지 않았어도 따뜻한 가족의 정이 느껴졌다.
대가 없이, 바람 없이 베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이모한테 이모의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펐냐고 물었다.
이모는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별 감정이 없었다고, 슬픈 느낌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났다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 잃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걸까.
이모한테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모는 그런 축복과도 같은 경험,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내가 느끼는 차가운 슬픔이야말로, 내가 받은 커다란 부모의 사랑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엄마가 수도 없이 적었던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매개체 비슷한 무언가였던 걸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묻는다면 그건 아직 아닌 것 같다.
물론 내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모 잃은 슬픔을 느끼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나에게는 그걸 느낄 정도의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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