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선풍기 소리가 상담선생님과의 오전 대화로 천천히 물든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
수영 한 지 오래되셨나 봐요.
음, 네. 좀 됐어요. 605일 됐네요.
오래되셨구나. 혹시 그럼 팔꺾기 하세요?
나는 입을 가리며 아이처럼 웃었다.
팔꺾기로 레벨 체크를 하시는 상담선생님이 내심 귀엽게 느껴졌다.
왜... 왜 웃으시죠..!
(웃음) 재미있어서요. 팔꺾기로 레벨 체크하신 거죠?
(웃음) 맞아요. 저도 전에 수영 배웠는데 팔꺾기 하기 전에 강습 기간이 끝났거든요.
그래서 팔을 쭉 편 상태로밖에 수영을 못 해요.
그러시구나. 네, 저 팔꺾기 하죠.
주로 어떤 영법 하세요?
주로 자유형, 평영 해요. 자격증 준비 중이거든요.
자격증이요?
네. 수상구조사라고, 사람 구할 수 있다는 자격증이 있어요.
그렇구나. 그런 자격증이 있다는 건 몰랐네요.
수영 잘하면 다 구할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해보니까 많이 다르더라고요. 수영을 잘한다고 해서 사람까지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렇구나. 유진 씨랑 물놀이 가면 죽지는 않겠어요.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유진 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글쎄요, 모르죠(웃음).
미래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근데 수상구조사는 왜 따고 싶으세요?
사람 구하는 자격증... 그런 자격증 꼭 따고 싶었어요.
유진 씨는 왜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할까요?
저번에 일본인 친구도 구해주시고. 궁금하네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누군가를 구하면 기분이 좋아요.
잠깐 동안은 '내가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구나' 생각도 들고
'이 사람 기억 속에는 내가 오래도록 남아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경청)
사이코처럼 들릴 수도 있거든요, 선생님.
사이코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실까(웃음).
아, 사이코는 아니에요.
심리학적 용어인 '사이코'의 의미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표현하는 '사이코'를 말했던 거였고요,
원래 말하려고 했던 건... [변태]랄까요? [정신병자]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엄---청 과장하면요, 누군가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린 다음에 살리고 싶은 정도랄까요.
물론 그런 행동을 하진 않겠지만, 그 정도로 좋다는 말이에요.
왜 그걸 변태나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셨어요?
글쎄요.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구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에이, 있죠. 경찰관이나 소방관, 군인, 그리고 저 같은 상담사들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상담을 통해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참 기분이 좋아요.
정말요?(미소) 그러시구나.
그럼요. 변태나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쓸모없는 인간
유진 씨는 스스로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누군가를 구하면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필요 없는 사람... 네, 종종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뇨, 자주요. 아니, 좀 많이요.
... 아니,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왜 스스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쓸모없는 게 맞거든요.
회사에서도 저는 의욕도 없고, 일 욕심도 없고, 돈 욕심도 없어서요.
일부러 나서서 일을 하지도 않고요, 시킨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아요.
물론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어요. 저도 입사 초기에 열심히 했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근데 어떤 일련의 과정으로 모든 집착을 내려놓게 됐어요.
이 일련의 과정을 다 말씀드리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해서, 다 말씀드리진 못할 것 같아요.
뭐 어쨌든. 시간이 흘러서 생각해보면, 일을 대충 하고 조금 하고 돈은 똑같이 받으니까,
그게 어떻게 보면 잘 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열 여덟 번 만날 동안 회사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네요.
그러네요.
...
...
회사에서의 제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선생님과 상담할 때 [회사 밖에서의 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눴었고.
모든 문제를 회사 밖의 저로부터 찾으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의 유진 씨도, 유진 씨죠.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나 봐요.
그러네요. 맨 처음에 화성에서 근무할 때, 처음 상담을 시작했던 이유가 '회사생활'이었거든요.
그때 좀 힘들었어요.
...웃기네요. 이제 와서 회사를 빼놓고 생각하려고 하다니.
그럴 수 있죠. 기억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과거 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자신을 의식하지 못했다.
저는 회사생활을 잘 하지 못했어요.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경청)
2017년에 스무 살 짜리 꼬마애가 입사했어요. 당연히 일을 못하니까 많이 혼났죠.
그때는 많이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후배들 가르칠 때 욕도 했고요.
웃긴 게 뭐냐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쭉 부모님한테 혼날 때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됐어요.
움직여서도 안 됐고요. 아빠한테 맞으면 팔을 올려서 아빠의 주먹을 막는 자세 그대로 버텨야 했어요.
움직이거나 말을 하면 아빠는 "왜 아빠가 얘기하는데 움직이냐? 왜 아빠가 말하는 데 쓸데없는 말을 하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회사에서도 똑같이 했어요. 선배한테 혼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근데 회사 선배들은 달랐어요. 오히려 뭐라도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 모습이 답답해 보였나 봐요. 그래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대답을 하니까 또 그러는 거예요. 왜 모르면서 대답을 했냐고, 대답을 똑바록 하라고.
좀 헷갈렸어요. 대답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또 재미있는 게 뭔 줄 아세요? 그 혼나는 순간순간이 저는 좋았어요.
시간이 엄청 빨리 흘렀거든요. 한 번 혼나고 나면 한 시간, 두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어요.
게다가 혼나는 순간이 엄청 편했어요. 안심이 됐달까요? 그리고 뭔가...
익숙했구나.
네, 그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익숙했어요. 아빠의 영향이겠죠.
익숙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일부러 혼나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어요.
안 그래도 회사가 싫은데, 시간이라도 빨리 가면 좋잖아요.
일부러 실수를 하고, 일부러 잘못을 해서 혼나는 상황을 유도했어요.
그렇게 상황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면, 그게 또 기분이 좋았어요.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원하는 상황을 제가 직접 만든 거잖아요.
아 근데 좀 많이 혼나고 나니까 '피해망상'이 생기더라고요.
회사 동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면 '아, 저 사람들 내 얘기 하고 있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동료들 중 한 명이 저를 보면 '분명 내 욕을 하고 있었겠다'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게 좀 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선배들은 저를 혼낼 때 주로 감정적으로 혼냈어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사람들 눈을 제대로 쳐다보기 힘들었던 게.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 무언가를 혐오하는 그런 표정이 보였거든요.
...다행히 군대에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이 괜찮아졌지만요.
그런데 또 그 순간마다 저를 혼내는 사람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아 저 선배 지금 화났구나'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게 재밌었어요.
혼나는 게 무서웠다던지 그러지도 않았고, 오히려 '음 이 정도구나' 생각했어요.
아빠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졌나 보네요.
맞아요. '겨우 이게 전부인가-' 생각이 든 적도 많았어요.
또 혼날 때 속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표정으로는 슬픈 척을 해야 했어요.
그게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냥 웃음이 나왔어요.
웃기더라고요. 저한테 직접 해를 끼치지도 못하면서 말로, 표정으로 뭐라도 해보려는 것 같았달까요.
...
...아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 말을 많이 했다고 느끼셨구나.
네, 조금...
... 근데 유진 씨는 이런 게 재미있어요?
나는 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선생님도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그게 두려웠던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선생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 네?
선생님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봤다.
선생님의 표정에는 조금의 악의나 혐오도 서려 있지 않았다.
저는 안타까워서요.
... 안타깝게 들려서요.
...
눈앞이 흐려지더니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일말의 예고도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를 정도로 긴 눈물이, 신호도 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급히 양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각휴지 박스가 책상에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선생님의 팔이 보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나는 아이처럼 손으로 눈물을 닦다가 한 손을 내려 각휴지 한 장을 뽑았다.
휴지를 뽑는 찰나, 클립보드에 시선을 고정하고 애써 고개를 들지 않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의 눈과 코에는 분홍빛 저녁노을이 내려 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선생님이 왜 슬퍼하는지 궁금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온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조금 울고 있어도 돼요.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년 전, 같은 자세로 울던 어린아이처럼 찡그려지는 얼굴을 제어할 수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왜지. 막 슬픈 건 아니었는데.
지금 어떤 마음이 들어요?
마음이요?
네, 어떤 생각이 들어요?
(깊은 생각)... 아무 마음도 들지 않아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어떤 마음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누군가 핸들을 확 틀어버리는 느낌이에요.
...
...
아, 마음이 좀 얼얼한 것 같아요. 화상을 입은 것 같은 느낌.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느낌일까요? 아니면 딱지가 떼어진 느낌일까요?
음... 딱지가 떨어진 느낌인 것 같아요.
딱지가 떨어진 뒤 연한 살을 문지르는 그런 느낌이요.
엄마를 생각하면 드는 [슬픔]이랑 비슷한데,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를까요?
[슬픔]은 마음을 세게 얻어맞는 느낌, 혹은 멍든 곳을 세게 누르는 느낌이라면,
지금 이 마음은... 아, 적당한 표현이 하나 떠올랐어요.
[시리다]... 좀 시린 것 같아요.
마음이 시큰거렸다.
딱지가 떨어진 상처
신경이 드러난 치아
밤송이에서 갓 떨어져 나온 밤알
바싹 잘려진 손톱 아래의 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바람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연고를 잘 발라야겠어요.
연고요?
바르고 싶지 않으세요?
그냥요, 지구상의 어떤 동물, 식물들도 상처를 입으면 입은 채로 그냥 살아가잖아요.
자연스럽게 낫고, 또 상처받고, 또 낫고. 근데 인간이라고 뭐가 달라야 하나- 싶어서요.
자연치유...랄까요.
...
글쎄요. 제가 유진 씨 상처를 그냥 두고 싶진 않은데요.
한참 동안 애꿎은 선생님의 소매자락만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생님의 눈동자는 따뜻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요(웃음).
... 노력해 볼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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