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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상담일기

[2026/08/25 화 10:00] '화가 나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되는데

by EugeneChoi 2026. 8. 25.

#기록

저는 말을 거칠게 하는 사람을 안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고
선생님 말씀처럼 감정을 잘 못 느끼는 것도 알았고요. 화 같은 거요.
그리고 사람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요.

사람을 안 좋아한다는 얘기는 안 하셨었는데,
생각하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또 드신 건가요?

네.

...

저번 상담날 저녁에 한 번 정리했었거든요, 내가 알게 된 나에 대해서요.
근데 모르겠어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래요. 기억 나면 천천히 또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사실 최근에 상담 내용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최대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적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오, 기록을 하기 시작하셨군요.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요?

변화요? 글쎄요.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이전까지 기록을 하지 않으시다가 기록을 시작했다고 하시니,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아서요.

아, 그런가요.
그런 거 아닐까요, 선생님은 띄엄띄엄 저를 보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일에 한 번.
하지만 저는 제 정신과 몸과 계속 함께 있으니까 변화하는 줄 모르는 거죠.

그래서 유진 씨가 못 보는 유진 씨를 제가 관찰하는 거죠.

아-

그래서 저번에 기록하시다가 궁금한 게 생기셨던 거군요.

네, 맞아요.
...변화라. 제가 어떤 게 변한 걸까요?

 

#어째서

아, 근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제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댔을 때 반사적으로 손을 떼는 것"이라는 비유를 대면서 말했던 거요.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제가 "유진 씨는 행동하기 전에 이성이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씀드렸고,
유진 씨는 "가끔은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바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하셨죠.

네. 둘 다 맞는 얘기예요. 
근데 그런 거 있잖아요. 누군가 저에게 "너는 화를 잘 내는구나" 말을 한다면,
내가 정말 화를 잘 내는지,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한 다음에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잖아요.

제가 그 비유(뜨거운 것)를 댔던 순간에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랬던 적이 있었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반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고 행동을 했던 적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

...

아.
...아! 있어요. 있었네요.

그게 언제였을까요?

... 괌이요.
친구들이 괌에 대해서 휴가처럼 말했을 때요.

그리고 또 있죠.

또요?

회사 선배랑 단 둘이 이야기했을 때요.

아, 그러네요.
있었구나.


내가 무언가를 기억해 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일렁임이 느껴졌다.

 

#화난 것과 삐진 것

그런데 유진 씨가 화난 모습들을 보면 약간 '삐진 것' 같거든요.

... 네?


나는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로 멋쩍은 듯이 웃어 보였다.


왜 웃으시는 거죠?

그냥요. 그 단어가 좀 웃긴 것 같아서요.

단어가 웃겨요?

네. 애들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모르겠어요. 그냥 웃음이 나와요.
제가 왜 웃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

아, 옛날에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제가 엄마인가 아빠한테 화나서 저 멀리로 걸어갔어요.
그리고 뒤를 돌은 채로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니 아빠가 다가와서 장난스럽게 물었어요.
"뭐 하냐, 도 닦냐? 삐졌냐?"

근데 전 삐진 게 아니었는데. 화난 거였어요.

삐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긴. 5살짜리 꼬마가 갑자기 뒤돌아서 멀리 간 다음에 꼼짝 않고 서있으면...
삐진 걸로 보이겠네요.


'화났다'라는 말과 '삐졌다'라는 말.
'삐졌다'는 한국에만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화났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


답답하고, 심장이 빨리 뛰고, 소리를 지르고 싶고...
모르겠어요. 좀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감정을 이해받지 못하니까 화를 내지 않았던 걸까요?

그런 것도 같아요. 아빠 앞에서 화내봤자 맞기만 했으니까요.
아, 형도 저한테 삐졌냐는 말을 많이 했어요.
전 화가 났었는데, 삐졌냐고 자꾸 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서로 주먹질하면서 싸웠어요.
... 제가 항상 졌지만요.

(웃음) 어린 유진 씨는 화를 많이 냈었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유진 씨에게는 화난 것과 삐진 것이 어떻게 다른가요?

화난 건... 무언가를 부숴버리고 싶고, 죽여버리고 싶고 그런 거잖아요.
삐진 건 아이들의 투정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질투? 투정? 그런 거요.
'화가 나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되는데 '삐져서 사람을 죽였다'는 좀 안 맞는 것 같고요.

유진 씨에게 '화'는 무언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감정이네요.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삐진 것'은 아이들의 중요한 감정표현 중 하나거든요.

아...

유진 씨도 그랬던 것 아닐까요?
"난 어학연수로 괌을 가는 건데, 왜 휴가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 답답해! 흥!"


나는 크게 웃었다.
내가 웃자 선생님도 따라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친구들 입장에서는 화낼 일이 아닌데 화를 냈으니, '왜 화를 내지?'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땐 근데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은 상했는데 하루 이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다음 행동을 했거든요.
... 모르겠네요. 그냥 그 말을 여러 번 들으니까 기분이 답답했어요.

그 답답한 감정, 화라는 감정이 유진 씨의 어떤 과거로부터 온 거예요.
감정은 기억과 같이 붙어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 그러네요.

그리고 유진 씨가 기억하는 그 과거는...

 

#마무리

다음 주엔 언제 볼까요?

화요일 괜찮아요.

그럼 화요일에 봐요.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선생님 쪽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근데 저 진짜 삐진 거 아닌데...

하하하하


선생님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이 크게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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