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날씨가 서늘해지다니.
귀신이 곡을 하겠네.
하늘이 칠흑 같다.
창밖으로는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건너편 빌라의 같은 층 집에서 거실 불을 켰다.
어둠 속에서 그 집의 창만 밝게 빛난다.
#유량이
유량이와 통화했다.
오늘은 사이버대 수강신청 시작일이었다.
나도 유량이한테 정보를 주고, 나도 정보를 받았다.
나는 3학년으로 편입해서 35학점의 교양 점수와 35학점의 자유선택 학점이 있었다.
졸업 조건으로는 18학점의 교양 학점이 필요한데, 나는 이미 35학점이 인정돼서 듣지 않아도 된다.
그걸 모르고 1학년 때는 교양을 들었었다.
다행이다. 이제 듣지 않아도 된다.
유량이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한국어교원자격증도 대학교에서 준비해보려고 한다.
2028년 1학기까지 학점 계획표를 짰다.
유량이의 계획표도 만들어서 메일로 보내줬다.
유량이가 고마워했다.
유량이와 대학교 수강신청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통화로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유량이는 최근에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 어떤 사람이 다리를 다쳐서 밥을 먹으러 나가지 못하자 유량이가 3주 동안 대신 밥을 가져다줬다고 한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주변에서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너 왜 쟤 밥 챙겨주는 거야?
유량이는 말했다.
"다리 아프잖아. 혼자서 밥을 못 먹는데, 도와줘야지."
유량이의 말을 듣고 누군가 말했다.
"그건 알지. 근데 굳이 왜 네가?"
...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말했다.
"하... 사람새끼인가."
유량이가 수화기 너머로 말을 이었다.
"우리 잠깐 같이 이야기했었잖아, 그때 괌 숙소 밖에서. 기억나?"
"기억나지."
"네가 말했잖아, 사람이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그랬지."
"나도 비슷하게 생각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그 친구는 밥을 못 먹잖아.
그래서 도와준 거야. 근데 주변에서는 자꾸 이상하게 엮으려고 해."
"다리 다친 사람이 남자였지?"
"응."
"사람들은 그래. 사람 대 사람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남자와 여자로 보려고 해.
자꾸 이야기를 만들고..."
"... 난 그냥 진짜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우리 괌에서 같이 놀았을 때, 그때도 그랬잖아. 주변 어른들이 자꾸 우리 사귀냐고 물어보고."
"그랬지."
답답했다. 사람들이 싫었다.
생각을 묻지 않고서 제멋대로 판단해 버리는 그런 인간들이 싫었다.
유량이도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
"그러니까 죽으려고 하지 말고.
나처럼 멍청한 애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너처럼 똑똑한 사람이면 더 잘 해내겠지."
유량이는 나보다 3살 어리다.
"그런가. 별로 잘하고 싶지도 않고, 잘 살고 싶지도 않은데."
"또, 또 그런 말 한다."
"(웃음) 알았어."
"행복하게 살아야지. 웃으면서."
"..."
나는 잠깐 침묵을 뱉었다.
"유량아."
"응"
"나는 너의 남자친구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저씨?"
"응."
유량이는 남자친구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이야. 근데 왜?"
"그래야 네가 행복할 테니까."
"오- 뭐야. 나의 행복을 바라는 거야?"
"응."
"왜?"
"...사랑이겠지."
"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거, 그거 쉽지 않잖아. 그 어려운 걸 하네."
"그러게."
"난 그거 되게 어려운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유량이는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걸까.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것,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있는 걸까.

#사람
"있잖아. 유량아."
"응. 왜?"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응."
"너는 사람 같더라."
"하하하. 사람?"
"응. 사람이어도 사람이 아닌 것들이 많잖아. 그냥 인간들..."
"맞아."
"너는 사람 같았어."
"응. 그래서 괌에서 나랑 논 거 아냐?"
"맞아. 그래서였어."
"알고 있었지. 무슨 말인지 알아."
유량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연락 자주 해."
"연락?"
"응, 연락. 잠수 타지 말고."
"잠수는 안 타지."
"갑자기 사라지거나 그러지 마."
"안 그럴 거야. 아직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유량이를 여자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좋아한다.
유량이는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봐 줄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
사람의 탈을 썼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
사람의 탈을 쓰지 않았지만 사람인 것들.
나는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깊은 생각에 빠진다.
멈추지 않는 풀벌레 소리에 졸음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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