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유]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멧새들의 대화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새벽 다섯 시의 검푸른 어스름은 여름날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아빠방에서 몰래 엄마방으로 넘어와 높다란 선반 위에 있는 분유통을 바라본다. 앱솔루트. 그 분유통의 몸통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방에 있는 빨래의자를 찾는다. 그리고는 곤히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몰래 둔다. 그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두 손으로 분유통을 꺼내 품에 안는다. 왼팔로는 분유통을 붙들고 오른팔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살살 돌린 뒤 작은 계량숟가락으로 분유를 크게 떠 입으로 가져다 넣는다. 계량숟가락을 분유통 안에 내던지듯이 놓고 뚜껑을 닫는다.
침샘에서 침이 흘러나오면서 귀 아래가 찌릿해진다. 분유통을 쏘삭거리는 소리에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뒤척인다. 숨을 멈추고 사람의 인기척을 알아챈 나방처럼 몸을 굳힌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한다. 이 작은 심장의 요동이 혈관과 피부를 타고 온몸을 규칙적으로 진동시킨다.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돌려 어머니가 누워 계신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어머니는 여전히 모로 누운 채 팔을 베고 있었다. 다행이다. 어머니에게 들킨다면 뺨 한두 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입 안으로는 침이 고여 분유가루를 서서히 적신다. 입을 천천히 오물거리며 가루들을 잘근잘근 씹는다. 입을 꾹 다문 채 빨래의자 아래로 내려온다.
숨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혹여나 가루들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의자를 치우고 다시 아빠방으로 들어온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로 누워 입 안에 남아있는 분유가루들을 목 아래로 넘긴다. 뒤늦게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분유 맛이 선연해지기 시작한다. 고소하고 달큰한 미숫가루와도 같은 그 분유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젖을 이 년 동안 떼지 않았던, 그 뒤로도 분유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두 살 아래 동생 청명이를 위한 것이었다. 가끔씩 어머니는 분유를 먹고 싶다는 다섯 살의 나에게도 분유를 타주었다. 알루미늄 앱솔루트 분유통을, 그 차갑고 둥그런 분유통에 적혀있던 한글과 읽지 못했던 영어 몇 글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가 여러 잡동사니를 보관하기 위해 재활용해 썼던 그 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