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구재/사십구재

49재 - 칠재

EugeneChoi 2025. 1. 17. 01:25


  양초 아래에 적힌 '소원성취' 네 글자가 검게 타들어간다. 양초는 짧아져 초꽂이 부분이 삐죽 튀어나왔다. 손바람으로 촛불을 끈 뒤 촛농이 굳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심지에서 탄내가 올라와 코를 자극한다. 굳은 양초를 들어내 새 양초로 바꾼다. 둥근 몸 한가운데 구멍이 나버린 차갑게 식어버린 양초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잘게 잘라 다시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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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어머니가 쓴 글들을 정리한다. 꽃들과 나무를 보며 적은 시들과 아무리 기원해도 수신자에게 닿을 수 없는, 어머니가 적은 모든 편지들을 옮겨 적는다. 엄마가 쓴 글들 모두 모아서 책 한 권 내보면 어떨까? 네. 그럴게요. 엄마 유명해지시겠네. 돈도 많이 버시겠어요. 그러냐? 그래도 난 우리 삼형제가 좋다. 우리끼리 살자. 언제쯤 우리 예쁜 삼형제랑 같이 사는 날이 올까? 언제쯤 저 강아지들 없이 몸 편히 마음 편히 자식새끼들만 보면서 살 날이 올까? 에이. 어머니 그래도 강아지들 사랑하시잖아요. 맞아. 저것들 없으면 또 심심할 것 같기도 해. 참 어렵다 그치? 그러네요.
  너는 어머니와 나누었던 햇살 같았던 대화들을 잊지 못한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성난 바람 앞의 장작불처럼. 비바람 맞으며 자라는 울진 대왕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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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겨우내 오십일 가까운 시간 동안 따뜻하게 지내지 않았다. 영하 십 도로 기온이 떨어지는 날에도 짙회색 스웨터 하나에 얇은 검정 코트 하나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너는 그래야만 했다. 올 겨울은 너에게 추워야만 했다. 어머니가 없는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너는 느껴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태양과도 같이 뜨거웠던 어머니 빈자리를, 노란 개나리같은 온정 없는 겨울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올 겨울은 부디 제가 느껴본 적 없는 매서운 추위로 가득 채워주소서. 제가 감히 견뎌낼 수 없는 한기와 시림으로 제 몸을 휘감아주소서. 너는 별이 촘촘하게 새겨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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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 없음에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니라. 그것이 나의 운명일지어니. 외로이 사회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방인처럼 살다 생을 마감하노라.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더라도 상대방은 필히 외로움을 느낄 것이리라. 내가 곁에 있음에도 텅 빈 공허함을 느낄 터이고 사랑한다 말해도 공허한 마음으로 가득한 그 말로 상처를 줄 터이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살아가리. 나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상처를 홀로 껴안고 평생을 홀로 살아가리. 그 누구에게도 가면 속에 감춰진, 여전히 선홍빛 피가 흐르는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리. 이 아픈 이야기가 흘러흘러 그 누구에게 닿는다면 무척 애달프게 만들 것이기에, 이 연한 마음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꼭꼭 눌러담아 땅속까지 가져가리. 한 편의 슬픈 영화처럼, 그렇게 살다가 외로이 생을 마감하리.
  겨울이 오기를. 하얀 겨울이 끝난 뒤에도 더욱 더 하얀 겨울이 찾아오기를. 이 마음에 따뜻한 봄의 계절이 영영 찾아오지 말기를. 소금으로 절여지듯 절망과 슬픔으로 절여진 내 마음 안고 끝나지 않을 이 겨울 속에서 삶이 다할 때까지 그저 방황만을 좇기를. 말라 비틀어진 검불 속을 헤치며 끝없이 펼쳐진 낙엽 하나 매달지 않은 나무가 이어진 길에, 차갑고도 어두운 그 길에, 이 검은머리 돌연변이 짐승만이 오롯이 발자국을 남길 수 있기를.
  유언으로 시작하고 유언으로 끝내는 날로만 내 삶을 가득 채우리라. 그 누구에게도 무해한 내 몸에 각인된 비릿한 상처들을 짐승의 손톱으로 긁어내고 딱지를 앉히고, 다시 뜯어내고 더 거대한 가피를 앉히리라. 끝없이 반복되는 억겁 굴레 속에서 그토록 원하는 애달픔과 애환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매일 찾아오는 이름 모를 그 아이와 함께 나 죽을 날까지 함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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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세상은 너가 눈을 뜸으로써 형상을 드러냈다. 너의 울음소리로써 주파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른 주파수의 통곡으로써 한 세상을 떠나보내었다. 그 세상은 참으로 광활했다. 저물지 않는 햇살이 드리우는, 갖가지 색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꽃들로 가득찬 들녘과도 같았다. 너는 그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어머니를 그린다. 파란 도화지에 선한 눈빛, 욕심 없는 코, 지혜로 가득찬 입을 그린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눈물로써 모든 그림을 번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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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축문을 불태우지 않는다. 영정사진을 장롱이나 서랍 속으로 감춰두지 않는다. 혹시라도 이승을 떠돌아다닐 어머니가 이 축문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놓여진 축문 주변으로 애닯게 서성이는 너를 찾아주기를 바란다. 가끔씩은 불어오는 바람으로, 가끔씩은 따사로운 햇살로서 곁에 머물러주기를, 너는 염원한다.
  너는 이십 육 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다. 찬바람에 두꺼워진 수피를 가진 거목처럼 우뚝이 서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아왔다. 이따금씩 너는 생각한다. 누군가 너 자신을 잡아준 것은 아닐까. 너도 모르는 새 하늘에서 혹은 땅에서 너를 굳게 잡아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 존재가 너의 어머니였을까.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살아왔던 너는, 사실 길다란 하늘과도 같은 어머니에게, 굳건히 찬란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드넓은 땅과도 같은 어머니에게 기대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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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바람이 부는 오늘도 너는 두꺼운 옷을 입지 않는다. 함박눈이 쏟아져도 모자를 쓰지 않는다. 한기에 손끝이 시려와도 주머니에 찔러넣지 않는다. 온기 없는 바람을 피하려 애쓰지 않는다. 말라 비틀어진 검불 속에서 구태여 피어난 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리움으로 채워진 하얀 겨울이 끝나간다.